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93 나뭇잎이 푸르던 날에 - 참깨꽃과 헤밍웨이

이득수 승인 2021.07.06 13:07 | 최종 수정 2021.07.07 08:41 의견 0
참깨꽃

조금만 비가 잦아도 망쳐버리기 일쑤인 참깨를 올해 모처럼 심었는데 보다시피 탐스럽게 자라서 꽃이 피었습니다.

제가 집을 지을 때 이 땅에서 곡식을 먹고 사는 사내라면 모름지기 한 200평쯤은 제 손으로 일구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중장비 대신 삽과 괭이로 돌을 파내면서 힘에 부쳐 경사면을 그대로 살린 게 물 빠짐이 좋아 참깨와 고추를 심기에는 안성맞춤이 된 것이지요.

전에 쑥갓꽃을 소개할 때 농작물이 화초보다 더 꽃이 예쁜 경우가 간혹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누가 봐도 눈부시게 희고 청순해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백합처럼 아름다운 참깨꽃입니다.

그런데 제가 자랄 무렵 참깨꽃이 피는 7월 초에는 장맛비가 한 두 번 내려 참깨 밭에 가는 발간 황토 길에는 매번 물이 쓸고 간 자국이 보이는데 그 위로 마주보며 행군하는 개미떼들이 처절하게 싸움을 벌여 꽃이 다 질 때까지 몇 며칠이 걸린 후에 마침내 한 쪽 편이 전멸당하는 이상한 광경을 해마다 목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참깨꽃에서 엄청난 꿀이나 꽃가루가 나오는 것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몸통보다 더 커다란 투구 같은 머리통이 떨어져나간 병정개미와 조그만 일개미와 버려진 개미 알 틈에 기어이 커다란 여왕개미까지 죽어야 싸움이 끝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참깨 꽃만 보면 개미들의 전쟁과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가 떠오르는 이상한 기억의 함정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지금부터 7, 8년 전 스페인에 관광을 갔을 때였습니다. 스페인내전(內戰)이 벌어진 <론다>라는 소도시의 <누에나> 다리를 구경하다 거기에 헤밍웨이가 참전했다는 안내를 듣고 순간적으로 참깨꽃과 개미떼들이 떠오르더니 높이가 수십m나 되는 웅장한 다리나 다리 위의 투우장과 <게르니카>라는 피카소의 그림을 예를 들어 전쟁의 비극을 설명하는 안내가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가. 그리고 고 온 종일 참깨꽃과 개미떼와 세상의 모든 우울이 다 깃든 중년의 텁석부리사내 헤밍웨이의 잔상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모처럼 참깨꽃을 보는 순간 문득 헤밍웨이와 <누에보> 다리가 생각나며 갑자기 등줄기로 식은 땀이 흘러내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지, 아니면 저만 저 아득한 기억의 골짜기에 함몰되어 버린 것인지, 꼭 필요한 건 잘도 잊으면서 잊어도 되는 건 건 잊지 못하는 이상한 고질병에 걸린 저는 너무 오래 되어 이제 스펠링도 잊어버린 제목 <포 훔 더 벨 톨즈>을 한참이나 되뇌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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