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래 시인이 읽어주는 좋은 시(47)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봉투를 용서해줘, 최금녀

조승래 승인 2024.07.11 09:24 | 최종 수정 2024.07.18 10:56 의견 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4
– 봉투를 용서해 줘

최 금 녀

해거리도 하지 않았다.
이름 한 번 적히지 않았다.
미안하지도 않았다.

날개를 달고 초량으로 갔다.
저녁 햇볕은 지붕에서 미끄럼을 타고
그림자까지 미끄러지고
더 미끄러질 것이 없으면 수업이 끝나고
사촌은 헤어지면서 주었다

- 월사금 걱정은 말고 -

오래전에 닫혀버린 전쟁

빌지도 못했다.

- MUNPA, 순수문학 계간 문파 No. 072)

시 해설

과실수도 매년 많은 과일을 생산하지 않는다. 어느 해는 많고 어느 해는 적다. 수확량 기준으로 변동하는 것을 해거리라 한다,

최금녀 시인은 그 옛날 피란 시절의 잊을 수 없는 기억 한 편이 살아난 것 같다. 부산 초량동으로 찾아갔을 때를 길게 묘사한다. ‘저녁 햇볕은 지붕에서 미끄럼을 타고 그림자까지 미끄러지고 더 미끄러질 것이 없으면 수업이 끝’나는 광경을 기억한다. 해가 지는 과정을 지붕에서 ‘미끄럼’을 타고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깜깜한 시점에서야 수업이 끝난다. 배움을 위한 고된 과정의 묘사이다.

곁에 있던 ‘사촌’ 혈연이 헤어지면서 봉투를 주는 것이다. ‘ - 월사금 걱정은 말고 -’라는 말을 하면서. 월사금月謝金은 스승에게 다달이 바치던 돈이 아니라 수업료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학비 걱정일랑 하지는 말고 배움을 멈추지 말라는 당부의 말이다.

그 덕분에 학비를 못낸 적도 없었기에 학비 안 낸 사람으로 이름도 적혀 본 적 없었으니 선생님으로부터 독촉을 받아보지도 못한 그 봉투의 고마움을 어찌 잊으랴, 전쟁은 오래전에 닫히어 끝났지만 기억은 닫을 수가 없다. 어디에 가서 말로 다 할 수 없으니 시 한 줄, ‘빌지도 못했다’라고 한참 늦은, 너무 늦어버린 인사를 한다.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음이 독자로서도 감동이다.

◇ 조승래 시인은

한국타이어 상무이사, 단국대학교 상경대학 겸임교수(경영학박사)를 했고,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이사, 문학의 집 서울 이사, 계간문예작가회 부회장, (구)포에지창원 '시향문학회' 회장, 가락문학회, 시와시학회, 함안문인회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취미생활로는 검도를 하고 있다(4단. 대한검도회 영무검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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