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나라 선왕이 물었다. “내가 들으니, 탕(湯)이 폭군 걸왕(桀王)을 남소로 추방하여 가두고, 무왕(武王)이 폭군 주왕(紂王)을 정벌했다고 하는데, 그러한 사실이 있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옛 문헌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걸과 주는 임금이고, 탕과 무왕은 신하인데, 신하가 자기 임금을 죽이는 것이 옳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신하가 어찌 임금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을 해롭게 하는 자는 흉포하고 포학하여 마음에 천리(天理)가 없으니, 이런 사람을 ‘해치는 자’라고 말합니다.
또한 의를 해치는 자는 천리를 어지럽혀 일마다 윤리를 상하게 하는데, 이런 사람을 ‘손상시키는 자’라고 말합니다. 손상시키고 해치는 자에게는 천명과 인심이 떠납니다. 천명과 인심을 잃은 자는 비록 왕위에 있더라도 일개 남자에 불과하고, 천하의 임금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무왕이 천명에 부응하고 인심에 따라 일개 남자를 베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임금을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과연 무왕이 주(紂)를 벤 것을 시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무왕이 일개 남자를 베었을 뿐, 임금을 죽인 것아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곧 탕의 일도 알 것입니다.
위 글의 출전은 ‘『맹자』/「양혜왕장구 하」/제8 문주일부장’이다. 원문은 한자 59자에 불과한 짧은 글이다. 그러나 이해를 돕기 위해, 정확한 이해를 위해 여러 해설서를 참조하여 필자가 의역을 하다 보니 길어졌다.
원문을 곧이곧대로 ‘축자역’(逐字譯)하면, 고기를 씹지 않고 그냥 통째로 삼키는 꼴이 되어 제대로 맛을 음미할 수 없다고 판단해, 꼭꼭 씹어 맛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의역을 했다.
먼저 편명(篇名) ‘문주일부장’을 보자. 원문은 ‘聞誅一夫章’이다. 주목해야 할 글자는 ‘주’(誅)이다. ‘주’는 죽이긴 죽이되, 그냥 막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죄를 물어’ 죽일 때 쓴다. 용례로는 ‘주살’(誅殺)이다. 곧 ‘죄를 물어 죽임’이다. ‘역적을 주살하다’
따라서 이 편명은 ‘죄를 물어 일개 남자를 죽였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에 관한 글’ 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폭군 걸왕과 주왕, 그리고 이들과 대비되는 성왕 탕왕과 주(周) 문왕은 기원전 12세기 사람이다. 맹자는 기원전 4세기와 3세기 어간의 사람이다. 곧, 맹자와 제나라 선왕은 거의 1000년 전의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 2200여년 후 지금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 이야기하고 있다.
3200년의 세월은 개인의 삶으로 보면 아주 장구한 기간이다. 세상이 변해도 몇 십, 몇 백 번은 변했을 것이다. 삶의 방식이나 사회제도는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한’ 것보다 더 많이 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3200여 년 전의 사건이 지금까지도 전해진다는 것은 그 사건의 함축적 의미가 아직 우리에게도 유의미하게 작용한다는 방증일 터이다.
신분제인 고대 중국에서는 죽음도 신분에 따라 다섯 가지로 나누어 불렀다. 임금(황제)이 죽으면 붕(崩), 제후가 죽으면 훙(薨), 대부(大夫)는 졸(卒), 선비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해 녹(祿)을 타지 못하고 죽었다는 뜻에서 불록(不祿), 서민은 그냥 사(死)라고 했다.
‘죽임’도 나누어 썼다. 살(殺)은 일반적으로 ‘죽이다’ 뜻이다. 반면에, 신하가 임금을, 자식이 어버이를,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죽일 때는 시(弑)를 쓴다. 시역(弑逆)은 신하가 임금을 죽임이요, 시해(弑害)는 부모나 임금을 죽임이다.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묻는다. “臣弑其君可乎”(신시기군가호·신하가 임금을 시역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弑’라는 글자 자체에 ‘인륜에 어긋남’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에 맹자는 대답한다. “문주일부걸의 미문시군야”(聞誅一夫桀矣 未聞弑君也). ‘殺’이 아니고 ‘誅’를 썼다. 그냥 죽인 게 아니고, ‘죄를 물어’ 죽였다는 것이다. 고대 봉건 사회에서 아무리 혼군(昏君)이라 해도 죽일 수 없다. 신분질서에 도전하는 패역(悖逆)이다. 신분질서는 하늘이 명한 것으로 절대 어겨서는 안 된다는 게 당시 사람들이 확고하게 인식한 세상질서였다.
맹자는 영리했다. 어떤 이유건 신하가 임금을 ‘弑’하면 반역일 뿐 아니라 천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하여 맹자는 폭군 걸왕을 왕이라 하지 않고, ‘일개 남자’(一夫)로 강등시킨다. 맹자 마음대로? 아니다. 맹자는 논리정연하게 걸왕은 왕이 아니고, 일개 남자임을 증명한다.
맹자의 논리 전개에는 행간 속에 숨은 뜻을 찾아내는 의역이 필요하다. 원문만으로도 맹자 당시의 사람들은 숨은 뜻을 알았다. 그러나 2200년 후의 우리는 시간과 에너지를 다대하게 투입하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하여 의역으로 그 숨은 뜻을 드러내어 밝히지 않으면, 맹자의 논리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왜 걸왕은 왕이 아니고 일개 남자에 불과한가? 당시 전국시대 사상의 시장은 유가, 묵가, 법가, 음양가 등 백가(百家)가 만발했다. 그 중 유가 이데올로그의 대표격인 맹자는 임금의 존재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하늘이 임금을 세우고, 백성이 임금을 추대한 이유는 인의(仁義)의 도를 다하기 위한 것입니다.”
‘인의의 도’란 요샛말로 하면, ‘국리민복’(國利民福)이다. 곧 안보와 민생을 뜻한다. 고대 봉건제 사회에 임금은 절대 권력을 갖는다. 하늘이 점지하고 백성들이 추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임금도 절대 의무가 있다. 바로 ‘인의의 도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데 그 임금이 인의를 해치고 손상시키면 어떻게 되는가? 하늘은 천명을 거두고, 백성들은 외면하게 된다. 곧, 임금으로서의 존재 이유를 박탈하는 것이다. 천명과 인심이 떠난 임금은 이미 임금이 아니다. 그냥 일개 남자일 뿐이다.
하여 맹자는 걸왕은 임금이 아니라, 일개 남자라 한 것이다. 그 남자가 죄를 지었으므로 그 죄를 물어 죽인 것은, ‘시역’이 아니라 ‘주살’로 정당화하면서, “임금을 시역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결론지은 것이다.
맹자의 이 논리 전개에 대해 제 선왕의 반응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은 ‘그렇군! 옳다’란 것이 너무나 당연하기에 굳이 기록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3000여 년 전의 왕은 천명을 받았다고 하여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왕도 국리민복을 ‘손상시키거나 해치면’ 일개 남자로 강등된다. 그리고 강등된 그 남자를 죄를 물어 죽임은 정당화되었다.
3000여 년 후 주권재민(主權在民) 시대의 대통령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국리민복의 향상에 있다. 한데 이 임무를 저버리고 외레 국리민복을 ‘손상시키고 해치면’ 어떻게 될까? 문명화된 현대에서는 ‘弑’하지는 않는다. 다만, 민주적으로 탄핵할 뿐이다.
대통령의 머리 위에는 탄핵이라는 ‘다모클레스의 칼’이 있다. 그 칼은 아주 가느다란 실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평소 명심해야 할 것이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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