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카스테 : 조국을 빼앗긴다는 것이 어떻더냐? 아마 큰 불행이겠지?
폴뤼네이케스 : 가장 큰 불행이죠. 말로 형언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불행하죠.
이오카스테 : 왜 불행하지? 추방된 자들에게 괴로운 점이 뭐지?
폴뤼네이케스 : 가장 나쁜 점은 ‘발언의 자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오카스테 : 그것은 노예의 운명이로구나. 제 생각을 말할 수 없다니 말이다.
폴뤼네이케스 : 통치자들의 어리석음을 참고 견뎌야 하니까요.
이오카스테 : 바보들과 함께 바보짓을 하는 것도 괴로운 일이지. -고대 아테네 비극 시인 에우리피데스(기원전 약 480년~기원전 406년)/『포이니케 여인들』-
파레시아(parresia)는 ‘모든 것을 말하기’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이다. 곧, 진솔하게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 거리낌이나 두려움 없이 말하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파레시아는 ‘진실 말하기’, ‘솔직히 말하기’, ‘발언의 자유’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파레시아는 3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진실을 말하기’, ‘위험을 감수하고 말하기’, ‘비판적 태도로 접근하기’이다. 미셀 푸코(1926~1984)는 파레시아를 개인의 덕이나 수사학(웅변술)적 기술이 아니라, 일정한 발언의 실천으로 이해했다.
수사학의 경우에 화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이 무엇이든지간에 청자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일정한 기술적 장치들을 사용한다. 나쁜 파레시아도 있다. 자신이 말하는 바에 신중하지 않고, 마음에 있는 것을 무분별하게 모두 말하는 것이다. 이런 나쁜 파레시아는 단순히 ‘수다 떠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참된 파레시아를 행하는 파레시아스트(parresiast)는 자신이 말하는 바가 진실하다고 믿기 때문에 진실한 바를 말하며, 진짜로 진실이기 때문에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파레시아스트는 자기 의견이 무엇인지를 솔직하게 말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이 진실이기 때문에, 알고 있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자유로운 발언, 진실 말하기는 어떤 진실을 자신의 진실로서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화자의 위험을 내포한다. 그 자유로운 발언 때문에 화자가 대화 상대자들의 분노나 거부의 위험에 즉각적으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파레시아의 보장은 고대 아테네 민주정의 핵심이었다. 이 파레시아의 현대적 해석은 다름 아닌 ‘비판’이다.
노자(老子·기원전 571년경~기원전 471경)는 ‘知者不言 言者不知’라 말했다. 곧, 아는 사람은 말이 없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는 사람/모르는 사람’과 ‘말함/말하지 않음’을 조합하면 경우의 수는 네 가지이다.
알고 말하는 사람, 알고 말하지 않는 사람, 모르고 말하는 사람, 모르고 말하지 않는 사람. 노자는 ‘알고 말하지 않는 사람’을 가장 높이 친 듯 보인다. 그러나 노자 자신은 ‘알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왤까?
추상적인 ‘도道’는 순전히 개인적인 영역이다. 이것은 특정 개인이 알아도 ‘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말이란 도구의 한계 때문에 말로써는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도는 말길이 끊어진 그 너머의 무엇이다.
그러나 공공선(公共善)은 다르다. 공공선에 대한 앎이 평범한 사회구성원의 상식을 깨뜨리는 일이라 분노를 유발한다 해도, 그 앎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해야 한다.
무분별하게 도에 대해서 말하고 추구하는 잘못을, 도를 아는 노자는 기꺼이 말로써 짚은 것이다.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는 자기모순을 감수하면서 말이다. 이 점에서 노자는 고대의 파레시아스트였다.
다산 선생(정약용·1762~1836)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서 아들에게 세상에는 두 가지 큰 기준이 있음을 알려준다. 하나는 옳고 그름, 곧 시비를 따지는 기준이고, 다른 하나는 이로움과 해로움, 곧 이해를 따지는 기준이다.
‘옳음/그름’과 ‘이로움/해로움’을 조합하면 이 역시 경우의 수는 네 가지이다. 다산 선생은 이 네 가지에 등급을 매긴다. 첫째 등급은 옳음으로 이로움을 얻는 것, 둘째는 옳음으로 해로움을 당하는 것, 셋째는 그름으로 이익을 얻는 것, 마지막은 그름으로 해로움을 받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확립된 치세(治世)에서는 옳음으로 이익을 얻는다. 곧, ‘진실 말하기’는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기득권 카르텔이 날뛰는 독재의 난세(亂世)에는 옳음으로 해로움을 받고, 그름으로 이익을 얻는다. 다산은 조선조 후기의 파레시아스트였다.
『총, 균, 쇠』의 저자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문명의 붕괴』에서 인류 문명의 존속 여부는 두 세력 간의 대결 결과에 달렸다고 요약했다. 문제를 악화시키는 세력과 문제를 해결하려는 세력과의 대결, 그 결과는 멀지 않은 미래에 결판이 날 것이다. 그에 따라 최악의 경우 지구는 인류의 멸종을 의미하는 ‘6차 대멸종’은 맞을지도 모른다.
제레드 다이아몬드를 원용하면, 우리의 역사 특히 근·현대사는 ‘진실을 말하는 자’와 ‘진실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자’와의 대결 무대였다.
작가 한강(1970~)의 대표작 『소년이 온다』는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소설이다. 박근혜 정부는 이 소설을 ‘사상적 편향성’을 이유로 세종도서 사업에서 배제하고, 작가 한강을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렸다. 아직도 북한(군) 개입 등을 주장하며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폄훼하는 자들이 있다.
스웨덴 한림원은 10일 작가 한강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하면서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섰다”는 점을 맨 첫머리에서 분명히 했다. ‘입틀막’에 대항해 ‘진실 말하기’에 높은 평가를 한 것이다.
세계의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해 있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전범(典範)에서 벗어난 지 한참이고, 유럽에서는 극우 포퓰리스트가 득세하고 있다. 중국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국 중심의 세계질서 개편을 획책하고 있고, 러시아 독재자 푸틴과 이스라엘의 극우주의자 네타냐후는 무모한 전쟁을 일으키고, 적대세력에 대한 과잉 대응으로 무고한 인명 살상을 멈추지 않고 있다.
파레시아(진실 말하기)가 막히면, 민주주의 또한 질식한다. 인류사적 입장에서, 한림원은 비민주적 불의를 용납지 않는 대한민국 민주시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과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 진실을 말하는 작가 한강을 ‘노벨문학상’ 수여라는 형식으로 지지를 표명한 것은 아닐까?
노벨문학상은 작가 한강 개인에게 주어졌지만, 수상의 원동력은 대한민국의 민주시민일 것이다. 곧, 노벨문학상은 대한민국 민주시민과 소설가 한강의 합작품임과 동시에 대한민국 민주시민 전체와 한강 개인, 모두의 몫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 그는 실로 이 시대의 위대한 파레시아스트이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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