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 칼럼】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 ⑤사랑, 서로 알아봄의 줄탁동시(啐啄同時)

조송원 승인 2024.11.26 10:55 의견 0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개인 우상화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연결했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야기의 힘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문제아였던 그의 아들 바실리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외경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아버지의 이름을 이용하자, 스탈린은 아들을 꾸짖었다.

아들이 “저도 스탈린이에요”라고 항의했다. 그때 스탈린은 “아냐, 너는 아니야”라고 대답했다. “너는 스탈린이 아니고, 나도 스탈린이 아니야. 스탈린은 소련 권력이야. 스탈린은 신문과 초상화에 등장하는 사람이지 네가 아니야. 나도 아니고!”

오늘날 인플루언서와 셀럽도 스탈린의 말에 동의할 것이다. 일부는 수억 명의 팔로어를 보유하고 있으며, 소셜 미디어를 통해 그들과 매일 소통한다. 하지만 개인 간의 진짜 연결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소셜 미디어 계정은 전문가 팀이 운영하고, 모든 이미지와 말은 ‘브랜드’라는 것을 창조하기 위해 전문가가 공들여 제작하고 선별한 것이다.

브랜드는 특정 종류의 이야기이다. 상품을 브랜딩한다는 것은 그 상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뜻이다. 이야기는 상품의 실제 품질과는 거의 관계가 없지만, 소비자들은 그것을 듣고 해당 상품을 떠올린다.

예를 들어 코카콜라사는 수십 년 동안 코카콜라 음료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들려주는 광고에 수백억 달러를 투자했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특정 재료로 맛을 낸 물을 볼 때마다 재미나 행복, 젊음을 떠올리게 되었다(충치, 비만, 플라스틱 쓰레기가 아니라). 이것이 브랜딩이다.

스탈린이 잘 알았듯이 상품만이 아니라, 개인도 브랜딩할 수 있다. 부패한 억만장자에게 가난한 사람들의 대변자 이미지를, 무능한 바보에게 실수 없는 천재 이미지를, 추종자들을 성추행하는 영적 지도자에게 성인의 이미지를 씌울 수도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특정인과 연결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와 연결되는 것이고, 이야기와 실제 인물 사이에는 대개 거대한 간극이 존재한다. -유발 하라리(김명주 옮김)/『넥서스』/이야기:무한한 연결-

잡초를 뽑아내거나 나무를 베어낼 때, 생명을 강제로 빼앗는다는 도덕적 죄책감을 의식하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개는 물론 소·돼지의 생명을 빼앗는 경우는 좀 다르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그 기준은 인간 종과의 멀고 가까운 친연 관계 때문이 아니다.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쾌고감수능력’(快苦感受能力)의 유무이다.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동물에 대해서는 사육과 도살에서 윤리적 접근을 해야 한다는 게 동물권자 혹은 동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반려견과 더불어 살고 고양이 몇 마리를 키운다고 해서 동물 애호가라 자칭하는 건 덜떨어진 언행이다. 자신의 애완동물뿐 아니라, 쾌고감수능력이 있는 모든 동물에 대해 ‘고통을 최소화하고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이 도덕적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동물 애호가란 이름에 값한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문어와 랍스터, 게를 포함한 일부 무척추동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과학적 증거가 밝혀진 뒤, 이 동물을 지각 있는 존재로 인정해 ‘동물복지법’에 포함했다. 그렇지만 개미와 다슬기에 쾌고감수능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미물에 대한 배려로 부처의 가피를 받았다는 불교 설화를 여럿 읽었다. 한 노파는 개미떼가 몰려 타고 있는 널빤지가 계곡물에 떠내려 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치마를 훔쳐 올리고 물에 들어가 그 널빤지를 건져내어 숲속에 가만 갖다 두었다. 뭇 생명을 구한 선업(善業)에 부처는 노파 손자의 고질병(앉은뱅이)을 고쳐줌으로 응보했다.

이런 유의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일 뿐이다. 다만, 미물의 생명을 무단히 해침은, 그 사람의 ‘자비의 씨앗’을 말린다는 부처의 가르침에는 동의한다. 예의의 대상을 인간을 넘어 여타 생명에로의 확장은 세상 인식에 대한 지평을 넓히는 일이 아닐까?

미물의 생명을 가벼이 짓밟고, 사회 정의에 눈 감는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지성에는 의혹의 눈길을 보낸다. 인류가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뭇 생명에게로 인식을 확장하지 못하면, 기후와 생태 위기를 결코 극복할 수 없다는 게 지론이다.

오래 전 <타임>지에서 사랑에 대한 특집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 내용의 대부분은 잊었지만, 사랑의 필수 요소 3가지는 가물거리지만 기억하고 있다. 친절과 지성, 그리고 약간의 기교(Kindness, Intelligence, and a bit of finesse)인 것 같다.

친절은 상대에 대한 ‘배려’를 말하는 거겠지. ‘로미오는 읽었는데, 줄리엣은 읽지 않았다’거나, ‘인사가 만사라 했는데, 저 친구는 인사성이 엉망이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끌리지는 않으리라. 약간의 기교, 있다고들 하던데 나는 모른다.

어쩜 빈틈없는 것 같다. 그러나 제법 오래 살아본 경험으로는 기본값(default)이 빠졌다. 경제력이다. 요즘 들어 더욱 ‘물질적 결핍’은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한다. 삶에는 삶에 고유한, 삶에 생래적인 고통과 괴로움이란 게 있다. 한데 지금은 이것들도 모두 물질적 결핍 탓으로 돌리는 게 대세인 듯하다. 반면에, 삶에 고유한, 삶에 생래적인 기쁨과 즐거움이란 게 있다. 한데도 이것들도 돈으로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대세인 듯하다.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인간의 모든 행동을 노동(labor)과 일(work)과 활동(action)으로 나누었다. ‘노동’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고된 행위이자 대단히 개인적인 행위이다. 이는 개인의 생활을 밑받침할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이에 반해, ‘일’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발휘해 사회에 뭔가를 남기는 행위이며, 창조적 성격을 띤다. 이는 세상에 갖가지 작품과 도구를 남기며, 개인적 재능을 발휘한다는 의미에서 개인적이지만, 세상에 산물을 남긴다는 의미에서는 반쯤 공적인 성격을 띤다.

‘활동’은 공적인 장에서 자신의 사상과 행동의 독자성을 발휘하는 행위이다. 이는 개인의 생활 유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공적인 장에서 공동체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며, 공공적 성격을 띤다.(나가야마 겐,최연희·정이찬 옮김/『밥벌이는 왜 고단한가』)

『밥벌이는 왜 고단한가』의 원제는 『노동의 사상사 : 철학자는 일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온 것일까』(勞働の思想史 : 哲學者は働くことをどう考えてきたのか)이다. 이 책은 통칭 ‘일하는 것’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특히 한 세대 전, 크게 보면 동시대인이라고 할 수 있는 한나 아렌트의 이론이 현 세상과 얼마나 동떨어졌는가를 확인하게 된다.

‘일한다는 것’ 혹은 인간의 모든 행동은 현 상황에 맞게 표현하면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거칠게 말하면 ‘돈이 되는 활동’과 ‘돈이 되지 않는 활동’으로 2대분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객관적으로 판단해도 부지런한 쪽이다. 수험을 앞둔 고등학생만큼 책상 앞에 앉아 ‘일’을 한다. 딱히 토·일요일도 쉬는 날이 아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일이 ‘돈이 안 되는 활동’이다. 하여 나는 가성비가 극히 낮은 사람이다. 하지만 어찌하랴, 그렇게 생겨먹을 것을.

사랑은 우연적 끌림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의 지속은 ‘내가 상대를 알아봄과 상대가 나를 알아봄’이 줄탁동시(啐啄同時)로 작용해야 한다.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다들 의지하며 살아간다. 필요의 합치로 그럭저럭 원만한 더불어 삶을 영위한다. 그러나 사랑은 세상에 흔치 않다. 그래서 노자는 ‘나를 아는 자는 드물다. 그러므로 나를 아는 자는 귀중하다’(知我者希 則我者貴)고 했던 것이다.

가까움과 멂은 아는 데는 세상을 알고, 자신을 알고, 상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앎보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상대가 나를 얼마나 아는가,를 아는 일이다.

우리가 조우하는 인연이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것은, 그 인연이 우리에게서 너무 멀거나, 우리가 그 인연에게서 너무 먼 탓이다. 누구의 일방적인 탓이 아니다. 하여 가는 인연 잡지 말고, 오는 인연 막지 말 일이다.

자 이제 슬슬 이츠와 마유미의 ‘연인이여(こいびとよ)’와 이광조의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을 오랜만에 한 번 들어 볼까나. <끝>

조송원 작가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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