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생존’. 다윈의『종의 기원』에서 밝힌 ‘환경에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뜻의 진화론 이야기가 아니라 ‘적는 자가 생존한다’,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우스개로 요즘 하는 말이다. 우리들이 아는 역사는 바로 기록의 역사이다. 기록하는 사람이 역사에 남는다. 부산의 미래를 위해 부산의 각계의 원로들을 기록하는 일이 시급하다. '지역 원로 아카이브'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기록·정리·보존함으로써 새로운 지역문화 콘텐츠를 만들자.
이순신 장군이 온 국민의 추앙을 받는 ‘구국의 영웅’이 된 것도 기록의 힘이 아닐까? 성웅 이순신은 조선왕조실록에 객관적으로 전투성과가 기록됐지만 무엇보다 장군이 전란 중에 꼼꼼히 기록한 『난중일기(亂中日記)』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이순신 장군이 있지 않을까? 게다가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이었던 류성룡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저술한 『징비록(懲毖錄)』도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징비록(懲毖錄)』이 역사적인 사실과 장군의 인간됨을 점검, 확인해줌으로써 성웅 이순신의 이야기(story)를 역사(history)로 만든 것이다.
역사적으로 부산을 빛낸 인물들은 많겠지만 우리들의 뇌리에 남는 역사적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은 기록이 남은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만한 근세 부산의 역사적 인물은 어떤 분들이 있을까? 부산학교재편찬위원회가 2016년에 펴낸 『부산학』 제4장 '부산의 인물'에는 근세의 인물로 천재 과학자 장영실(?~1442),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1551~1592), 독도지킴이 안용복(?~?), 개항기 선각자 박기종(1893~1907), 백산상회의 설립자 안희제(1885~1943), 독립운동가 박재혁(1895~1921), 독립운동가 박차정(1910~1944) 등 일곱 분이 소개됐다. 그리고 '현대의 인물'로 소설가 김정한(1908~1996),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1898~1959), 부산의 자랑스런 기업인 강석진(1907~1984),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1911~1995),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이태석(1962~2010) 등 다섯 분이 나열됐다.
이 분들은 조선시대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인물로 부산광역시 홈페이지의 ‘20세기 이전 부산을 빛낸 인물’(2002)과 『20세기 부산을 빛낸 인물(Ⅰ)』(2004), 『부산을 빛낸 인물(Ⅱ)』(2005) 그리고 『시민을 위한 부산인물사(근현대판)』(부경역사연구소, 선인, 2004)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는 지면의 한계로 인해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을 더 담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일례로 부산의 예술과 문화를 빛낸 분들은 특히 현대로 오면서 정말 많지만 지면의 한계로 인해 아쉽지만 제외하였고, 또한 훌륭한 분들임에도 불구하고 생존한 분은 선정대상에 넣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 역사적 인물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부산지역의 각계 원로분들은 언젠가는 역사적인 인물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원로 분들이야말로 바로 우리 부산의 인물콘텐츠이자 미래의 역사인물임을 잊고 이분들의 삶의 기록이나 평가, 보전활동을 소홀히 해오지 않았는가?
그러고 보면 필자가 개인적으로 틈틈이 뵀던 부산지역의 원로 분들이 어느덧 세월의 흐름에 이제는 고인이 된 분들이 제법 계신다. 천재동(1915~2007), 최해군(1926~2015), 최민식(1928~2013), 이용길(1938~2013) 선생 같은 분들이 그렇다. 이 분들은 이제 ‘부산의 별’이 되어 저 하늘에 빛나는 분들이다.
증곡 천재동 선생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 ‘동래야류’ 보유자로 2007년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1945년 이래 초중교사를 25년 했고, 1971년 가면제작 보유자로 인정됐다. 1973년 동래야류 연희본 정립 및 앞놀이, 뒷놀이 조사 발굴을 하는 등 동래들놀음의 탈 장인으로 40여 년간 토우, 동요민속화, 연극, 가면탈, 민속놀이 분야에 걸쳐 예술혼을 발휘해 온 인간문화재였다. 1990년대 초 기자였던 필자는 취재 차 선생님 댁을 방문해 그 많은 탈을 구경하고 놀란 적이 있다.
솔뫼 최해군 선생은 소설가이자 향토사학자로 부산학의 대가이자 시민운동가였다. 2015년 향년 89세로 별세했다. 동래에서 태어나 1956년 경남대 문학부 문학과를 졸업했다. 1962년 '사랑의 폐허에서'로 부산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했으며 또한 희곡 '종막'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도 당선했다. 1973년 부산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1982년 부산소설가협회 창립회장을 맡았으며, 1987년 장편소설 '부산포'(전3권)를 펴냈고, 1997년 향토역사서 '부산 7000년, 그 영욕의 발자취'(전 3권)를 펴냈다. 2007년 부산시민단체협의회 상임공동대표, 부산소설가협회 고문, 부산작가회의 고문, 부산을 가꾸는 모임 명예회장, 부산항을 사랑하는 시민모임 공동대표 등 누구보다 ‘부산을 사랑한 분’이었다. 부산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한 책만 15권을 펴낸 진정한 부산의 큰 어른으로 기억된다. 시민단체 모임에 갔을 때 뵈면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지으시던 분이다.
최민식 선생은 다큐멘터리 1세대 사진가로 2013년 부산 남구 대연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세였다. 선생은 황해도 연백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월남했으며, 한국전쟁이 끝나자 일본으로 밀항, 도쿄 중앙미술학원에 들어가 2년 동안 미술공부를 했고, 그곳에서 우연히 접한 에드워드 스타이켄의 사진집에 매료돼 독학으로 사진을 공부하며 사람을 소재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주로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의 남루한 일상을 카메라에 담는 휴먼작가였다. 1974년 한국사진문화상을 비롯해 도선사진문화상, 현대사진문화상, 예술문화대상본상 등 많은 상을 받았고, 1962년 대만국제사진전에서 처음으로 2점이 입선된 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20여개 국의 권위 있는 사진공모전에 무려 220점이 입상했다. 선생은 2008년 자신의 사진 원판 10만여 장 등 13만여 점의 자료를 국가기록원에 내놔 민간 기증 국가기록물 제1호로 지정됐다. 2013년 8월 (재)협성문화재단은 선생의 리얼리즘 사진철학과 작가정신을 기리기 위해 '최민식 사진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한다. 필자는 1997년 봄에 선생이 개설한 3개월 과정의 부산YMCA 사진 강좌를 수강했고, 선생님 댁을 방문해 엄청난 사진 관련 자료를 보고 많이 놀랐다.
좋은미르 이용길 선생은 부산 미술계의 1세대 판화가(스스로는 ‘찍그림꾼’이라고 불렀다)로 2013년 향년 75세로 별세했다. 1962년 낙동중학교를 시작으로 덕명여중, 덕명여고, 동성고 미술교사로 있었다. 선생은 미술계의 한자어와 외래어를 순우리말로 고쳐 쓰는 운동을 펼쳤다. 판화를 '찍그림'이라 하고 회화는 '칠그림', 사진은 '빛그림', 조각은 '깎새', 아틀리에는 '그림방', 갤러리는 '폄터'라고 불렀다. 선생은 2007년 부산 미술계 관련 기사 스크랩북 100여 권과 미술서적 1만 권 등 50톤 가량의 자료를 부산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필자는 기자 시절인 1993년 ‘가훈을 찾아서’라는 기획 기사 취재를 위해 선생님 댁을 방문한 적이 있다. 선생의 가훈은 ‘안 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 있다’였다.
몇 년 뒤에 부산지역의 원로 문인들의 부음소식이 잇달아 나왔다. 박창희 칼럼니스트(스토리랩 수작 대표)는 국제신문(2018.4.23) ‘세상읽기’ 칼럼에서 ‘낙화하는 지역 어른들’이란 제목의 글을 통해 부산지역의 원로 문인들의 별세소식을 안타까워하며 원로들에 대한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요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역 어른이 속속 세상을 떠났다. 최해군, 이해웅, 김규태, 오정환, 최화수, 이규정…. 최근 몇 년 사이 유명을 달리한 부산지역 문인들이다. 모두 무에 그리 급했던지 봄날의 낙화(落花)처럼 뚝뚝 져버렸다. 조사도, 조문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황황히 가버린 이들. 떠남과 결별은 예고 없이 찾아와 남겨진 이들을 헛헛하게 한다. 이게 삶인가 싶다가도 우련 마음이 붉어지고, 아무것도 쥐여 드리지 못하고 떠나보낸 마음 한구석엔 죄스러움이 쌓인다. (중략)
지난 13일 별세한 소설가 흰샘 이규정은 요산 김정한의 정신을 이어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준 지역 어른이었다. 그가 지역의 정신적 언덕이었던 만큼 문단의 상실감은 누구보다 컸다. 그의 치열한 작가정신과 올곧은 몸가짐, 시민사회활동 등은 지역사회의 귀감이었다. 2015년 8월 솔뫼 최해군이 타계한 이후 잇따른 지역 작가의 부음은 지역의 손실이자 크나큰 아쉬움이다. 무엇으로 이들의 빈 공간, 빈자리를 채운단 말인가. 솔뫼는 부산학의 뼈대를 세운 어른이었고, 이해웅 김규태 오정환은 지역시의 우뚝한 봉우리였다. 기자이자 작가였던 최화수의 글은 얼마나 명쾌하고 오묘했던가.
살아 계실 때, 이들의 ‘작은 평전’ 하나 써드릴 수 없었던가 하는 자괴감이 인다. 한 분 한 분이 지역 문단의 얼굴이요, 언덕이며 도서관이었다. 평가가 다소 엇갈린다 해도, 이들이 있어 지역문화는 노래하고 꽃을 피웠다. 뒤늦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 지역 어른 챙기지 않는 풍토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부산은 지역 어른에 대한 대접이 소홀하기로 호가 난 도시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어른이 병마에 시달려도, 타계해도 별 관심이 없다. 지역 어른 챙기지 않는 게 어느덧 부산의 습성이 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중략)
지금이라도 부산시가 ‘지역원로회의’(가칭)를 만들고, 문화계에서 ‘작은 평전’ 쓰기 운동이라도 벌여야 하지 않을까. 존경받는 지역 어른의 삶은 이른 바 ‘인간 자본(Human capital)’이다. 서부산 개발이니, 지역재생이니 하며 천문학적인 돈을 털어 부으면서 정작 사람을 챙기는 데엔 인색하기 짝이 없다. 사람 없는 문화도시나 창조도시가 허깨비임을 모르는 걸까. (중략) 지역 어른은 한 도시의 경험과 경륜의 알짬이며, 인간 자본의 대명사다. 이들을 보는 눈이 달라져야 한다.’
이제는 안타깝게 돌아가신 ‘부산의 별’은 물론 현재 우리 지역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지역원로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이다. 우선 생각나는 분이 김문숙 민족과 여성 역사관 관장(93세), 김동수 박사(93세) 같은 분이다. 김문숙 관장은 지난해 개봉한 일본군 종군위안부 소송을 다른 영화 ‘허스토리’의 주연배우 김희애의 실존인물이다. 김동수 박사는 의사로서 무료진료를 해왔으며 부산YMCA 이사장, 부산생명의 전화 이사장 등 부산지역 시민사회의 큰어른으로 지역에 헌신해온 분이다. 이 분들 외에도 이와 같이 지역에 헌신해온 분들의 삶을 부산과 연관지여 좀 더 생생하게 기록하고, 스토리를 만들고, 보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언론계 출신 차용범 박사(언론법)가 지은 『부산사람에게 삶의 길을 묻다』(미디어줌, 2013)에는 부산영화 대가 감독 곽경택, 클래식 대중화의 선구자 금난새, 건반 위의 구도자 피아니스트 백건우, 생각하는 건축가 승효상, 그림 기증하는 화상 신옥진, BIFF 집행위원장 이용관, 희망의 시인 수녀 이해인, 명예 부산시민 독일신부 하 안토니오 몬시뇰(1922~2017), 국민 야구해설가 허구연 등 18명의 부산 인물 인터뷰 기사가 정리돼 있다.
이런 점에서 부산은 ‘역사를 만드는 도시’가 돼야 한다. 그 첫걸음이 미래의 역사인물을 발굴하고 이들의 삶을 재조명하고, 이들의 기록을 정리보관하며, 그것을 지역화, 세계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이런 제안을 한다.
첫째, 지역의 각계 원로에 대한 생생한 자료를 정리하고 보관하고 남기는 부산시 문화행정이 필요하다. 앞서 언급한 박창희 칼럼니스트는 ‘지역사 휴먼 라이브러리’를 구축하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지역 원로는 한 분 한 분이 바로 ‘지역의 인물사 도서관’이고, 이들의 연륜과 경륜, 삶의 족적들은 ‘문화재적 가치’가 있기에 이들의 마지막 숨결, 마지막 세상과의 교유록을 기록해 남겨야 한다. 평전, 작은 자서전, 소책자, 영상기록으로도 남길 필요가 있다. 부산시나 부산문화재단이 적극 나서고 시의회가 예산을 반영해 연차 사업으로 ‘지역 인물사 아카이브’를 구축하면 어떨까? 부산시나 부산문화재단은 이 같은 사업과 관련해 각계 각층의 의견을 수렴해 추진방안을 모색했으면 한다.
둘째, 이러한 것이 가능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시민과 함께 ‘부산학 연구’를 심도 있게 추진할 필요가 있다. 지역원로의 기록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야 한다. 우선 각계의 지역 원로에 대해 개인의 소사를 정리하고, 이를 시민과 함께 가치를 공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가령 민관거버넌스를 통해 부산인물(사)선고(選考)위원회 같은 것을 만들어 학자들이 정리한 것을, 시민들과 소통하면서 연차적으로 예산을 반영해 추진해 나갈 필요가 있다. 지역언론도 좀 더 적극적으로 지역 원로에 대한 기록과 시민과의 소통작업에 나서면 좋겠다.
셋째, ‘부산의 별’이 된 작고 원로들의 자료나 작업실, 생활공간을 이제는 ‘부산시의 문화자산’으로 보존하는 플랜을 세워야 한다. 이들 원로들의 삶의 공간을 사후에 ‘자료관’ 또는 ‘기념관’으로 만들어 도시의 브랜드로 만들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이들 생존 또는 작고 원로분들의 후손이나 각계 전문가그룹과 상의해 개인 재산은 보전을 하되 공익을 위해 ‘사회적 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도움을 줄 수 있는 관리체제를 지금부터 갖춰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자산’을 일목요연하게 하나의 문화지도로 제작해 국내외에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넷째, 이러한 것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부산이 개인 생활사 기록을 중시하는 ‘기록문화의 도시’로 탈바꿈해야 한다. 지역 원로, 명사만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 일반 시민들이 삶을 기록하는 법을 배우며 성장하도록 해야 한다. 작지만 시민들이 스스로 자신의 가정에서, 학교에서, 기업에서 가족사와 시민평전을 정리하는 활동에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개인사 기록을 위한 글쓰기나 사진, 다큐제작 아카데미 같은 것을 적극적으로 열고, 이를 지자체나 문화재단 같은데서 적극 지원할 필요가 있다. 지역원로뿐만 아니라 사회소외층의 삶을 대변할 수 있는, 인생기록도 제작돼야 한다. 부두노동자의 삶이나 지역 독거노인의 삶도 스스로 또는 사회적으로 기록하는 문화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마을 노인 한 분이 돌아가시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매일매일 방대한 지식의 바다에 살고 있다. 디지털 기기로 손쉽게 정보를 생산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지역의 사람들의 삶의 기록에는 소홀하지 않았는가 반성해본다. 사람이 콘텐츠이다. 그리고 하여 우리 부산이 진정한 문화예술 콘텐츠의 산실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기록하는 사람이 역사에 남는다. 기록하는 도시가 역사적 도시로 남는다. 우리 모두 삶을 기록하는 법을 배우며 성장하자.
<경성대 교수·환경경제학자, 소셜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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