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8일은 ‘독도지킴이’ 안용복(安龍福) 장군을 추모해 제향을 올리는 날이다. 안용복 장군은 17세기 말 울릉도 독도가 명백한 우리나라 영토임을 주장해 일본으로부터 확약을 받은 민족의 위인이지만 부산 출신임을 아는 국민들은 많지 않다.
사단법인 안용복장군기념사업회는 매년 4월 18일 수영사적공원 내 수강사(守疆祠: 강토를 지켜낸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지어진 안용복 장군의 사당)에서 안용복 장군 추모 제향을 연다. 보통 제향날에 전국 각지에서 300여 명이 모여 행사를 하지만 정작 부산시민들은 잘 모른다. 기념사업회 사람들은 제향 때에 역대 부산시장의 경우 안씨 성을 가진 고 안상영 시장 때만 적극 참석했고, 그 뒤 다른 시장들이 찾는 걸 거의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국민적인 관심을 갖고 오래 전에 출범한 기념사업회가 종친회의 기념사업으로만 머물게 되는 게 아닌지 우려했다. 정부와 부산시에 대한 서운함도 없지 않은 것 같았다.
필자는 이 글을 쓰기 전에서 16일 수영사직공원 좌수영성지에 있는 안용복 장군 사당 수강사를 들러 안용복장군상과 안용복장군충혼탑을 참배했다. 안용복장군기념사업회가 안용복장충혼탑을 1967년에 세웠는데 2001년에 수강사를 건립하고 충혼탑도 새로 조성했다. 이어서 부산 동구 좌천동에 있는 안용복장군기념부산포개항문화관(2014년 개관)도 둘러보았다. 거기엔 일본으로 건너갈 때 타고간 배를 복원한 모형이 크게 세워져 있었다. 안용복은 조선 숙종(재위 1674~1720년) 때 동래 어민 출신의 좌수영 수군인 능로군(노꾼)이었지만, 왜인들에게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약받는 등 큰 업적을 세워 장군으로 추앙받았다.
안용복보다 조금 늦은 시기를 살았던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성호사설(星湖僿說)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안용복은 영웅에 비길 만한 사람이다. 미천한 군졸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해 강력한 적과 대항해 간사한 마음을 꺾어,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하고 한 고을의 토지를 회복했으니, 영특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상을 주지 못할 망정 형벌을 주고 나중에는 귀양까지 보냈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울릉도는 척박하다 하더라도 울릉도를 빼앗기면 대마도가 하나 더 생겨나는 것이니 앞으로의 재앙을 이루 말할 수 있으리요? 그러니 안용복은 한 세대의 공적을 세운 것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을 나라의 위기 때 병졸에서 발탁해 장수로 등용해 그 뜻을 펴게 했더라면, 그 이룩한 바가 어찌 이에 그쳤겠는가?(안용복장군, 안용복장군기념사업회, 1967)
‘독도지킴이’ 안용복(安龍福)은 숙종 시기인 1693년에 일본 본토에 가서 막부의 고위 관료 앞에서 당당하게 독도가 우리 땅임을 주장하여 일본이 인정하게 만든 인물이다. 당시 대마도주가 죽도에 우리 어민들이 들어왔다며 울릉도를 슬쩍 죽도인 양 기만하려 하자 그는 조종의 강토를 한 치도 내줄 수 없다고 주장해 죽도는 무시한 채 울릉도에 대한 소유를 못 박았다. 안용복은 조선과 일본을 상대로 이중플레이를 펼치며 울릉도를 편입하려 했던 대마도주의 행위를 고발해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확고하게 만든 인물이다. 조정에서는 일본과의 마찰을 우려해 그를 참수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영중추부사 남구만 등의 변호로 처벌을 늦추었다. 그는 비록 조선의 현실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벌 대상이었으나 이미 기개 있는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안용복 ‘장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원래 정식 장군이 아니라 일본에 건너가 당당히 울릉도와 독도를 한국땅이라 주장해 일본을 굴복시킨 그 기개를 높이 사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용복은 독도 문제가 다시 불거진 1960년대 와서 재조명됐다. 1967년 1월 대통령 박정희는 “국토를 수호한 공로는 사라지지 않을 것(國土守護, 其功不滅)”이라는 휘호를 안용복장군기념사업회에 기증했고, 같은 해 10월 기념사업회가 부산 수영사적공원 안에 탑을 세울때 장군이란 칭호를 붙였다고 한다. 고려 초기의 외교가이며 문신으로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해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내세워 거란군을 물리친 서희 장군이 생각난다. 안용복에 대해 노산 이은상은 ‘수포장(搜捕將) 울릉군(鬱陵君)’이라고 부르며 시를 짓기도 했다.
안용복 장군의 업적이란 무엇일까? 하나는 그동안 섬에 사람이 거주하지 않도록 하는 공도(空島)정책이 보여주었듯이 울릉도ㆍ독도와 관련해 희박했던 조선의 영토의식을 높였다는 것이다. 두 번에 걸친 도일(度日)로 조선 조정은 두 섬의 영유권과 조업권이 분쟁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했고, 뒤늦게나마 적극적으로 대응해 권리를 확보했다. 다음은 일본(대마도)의 교섭태도가 변화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일본은 억지와 기만에 근거한 외교를 유지해왔지만, 안용복 사건을 통해 조선의 강경노선을 인식한 결과 유화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로 바뀌었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그럼 안용복 장군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장군의 인적 사항은 흐릿하다. 태어난 해는 1658년 또는 1652년설이 공존한다. 모두 돗토리번(鳥取藩)의 번사(藩士) 오카지마 마사요시(岡嶋正義)가 지은 『죽도고(竹島考)』(1828년)에서 나오는데 1652년설은 안용복 자신이 제1차 도일(1693년) 당시 42세라고 진술했다는 기록에 따른 것이고, 1658년설은 같은 책에 실린 안용복의 호패(1690년 발행 호패에는 33세)에서 추산한 결과다. 호패 나이로 제1차 도일 당시 36세였다. 호패에는 ‘주인은 서울에 거주하는 오충추(主京居吳忠秋)’라고 돼 있어 그의 신분이 사노비였음을 알려준다.
이익의 『성호사설』등에는 안용복이 동래부 전선(戰船)의 노꾼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는 얼굴이 검고 검버섯이 돋았지만 흉터는 없었다. 키는 4척 1촌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환산하면 너무 작아(123센티미터 정도) 오기로 보고 있다. 호패에는 이름도 ‘用卜(용복)’으로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거주지는 ‘부산(釜山) 좌자천(佐自川) 일리(一里) 십사통(十四統) 삼호(三戶)’로 적혀 있는데 지금의 부산시 동구 좌천동 일대이다. 『성호사설』에는 또한 ‘동래부의 노꾼으로 왜관을 드나들어 일본어를 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2차 도일 후 우리나라 조정은 안용복이 함부로 벼슬을 사칭하고 양국 간에 외교 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안용복을 체포해 사형에 처하려 하다 격론 끝에 유배형으로 감형됐다. 1658년에 태어난 것으로 계산하면 40세 때의 일이었다. 유배형에 처해진 뒤 그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우리나라 외무부 홈페이지를 보면 독도와 관련하여 안용복의 활동의 의미를 이렇게 소개해놓았다.
안용복은 조선 숙종 때의 인물로서, 1693년 울릉도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피랍되는 등 두 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1693년 안용복의 피랍은 한·일 간 울릉도의 소속에 관한 분쟁(울릉도쟁계)이 발생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 과정에서 울릉도와 독도의 소속이 밝혀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1696년 안용복의 두 번째 도일(渡日)과 관련, 『숙종실록』은 안용복이 울릉도에서 마주친 일본 어민에게 “송도(松島)는 자산도(子山島, 독도)이며 우리나라 땅이다”라고 말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우리나라 땅인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일본의 침범에 항의하였다고 진술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용복이 일본으로 건너갔던 사실은 우리나라 문헌뿐만 아니라 『죽도기사(竹嶋紀事)』, 『죽도도해유래기발서공(竹嶋渡海由來記拔書控)』, 『인부연표(因府年表)』, 『죽도고(竹島考)』등의 일본 문헌도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2005년) 일본에서 새로이 발견된 사료인「원록구병자년조선주착안일권지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1696년 안용복이 오키섬에 도착하였을 때 오키섬의 관리가 안용복을 조사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는 안용복이 울릉도(竹島)와 독도(松島)가 강원도 소속이라고 진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 『숙종실록』의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라고 돼 있다.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를 보면 ‘안용복이란 어떠한 인물이었나?’라고 하는 Q&A 자료가 나온다. ‘안용복은, 1693년 울릉도(당시 일본명 다케시마)에 출어한 오오타니가의 우두머리의 대리인에 의해 일본에 함께 돌아와, 1696년 돗토리번에 호소할 게 있다며 자의로 일본에 온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 후 안용복이 국외로 건너갔다는 이유로 조선에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취조 때 안용복은 울릉도에서 일본인의 월경을 비난해, 일본인들이 송도(松島)에 살고 있다고 하니, 송도는 '자산도'이며 이 또한 ’우리나라 땅‘이라고 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 후의 조선 문헌에서 우산도와 오늘의 다케시마를 연결짓는 표현이 생겼습니다. 한국 측은 이 안용복의 조사 때 진술을 다케시마의 영유권의 근거의 하나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안용복의 진술은 『숙종실록』의 숙종 22년(1696년) 9월 무인조(戊寅条)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헌에서는 당시 조선이 안용복의 행동을 알지 못했고, 그 행동은 조선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라고 인식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안용복의 진술 자체에 대해서도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묘사가 많이 있어 신빙성이 부족합니다.’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안용복 장군의 ‘대표성’과 ‘진술의 신빙성’에 대한 보충자료를 붙여놓고 있는데 참으로 궁색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안용복 장군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독도 문제는 물론 울릉도까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논리에 줄곧 시달릴 뻔했다. 『시민을 위한 부산의 역사』(부경역사연구소, 선인, 2013)에 오인택 부산교대 교수의 ‘울릉도 지킴이, 안용복은 부산의 보통사람’이란 글이 있다. ‘현재 독도가 일본이 주장하는 영유권 시비 대상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가 일본의 영유권 시비 대상인 적이 있었다. 오늘날 울릉도가 한국 영토라는 사실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 가운데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이는 조선시대의 영유권 시비 과정에서 울릉도를 지켜낸 결과이다. 여기서 잊을 수 없는 인물이 부산의 보통사람 안용복이다. 동래에 살던 평민 신분의 어부였던 그는 17세기의 울릉도 영유권 시비에서 일본 대마도의 농간을 막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다.’
이제 부산시도 좀 더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 해양수도 부산을 이야기한다면 빼서는 안 되는 인물이 ‘안용복 장군’이다. 안용복 장군은 우리민족의 위인이자 우리 부산의 자랑이다. 우리 국민들에게, 나아가 부산을 찾는 외국인에게도 안용복 장군을 널리 알려야 한다. 안용복 장군의 정신이 바로 부산정신임을 알려야 한다.
그래서 나는 부산 차원에서 안용복 장군의 기개와 정신을 국내외에 알리기 위해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 부산시는 안용복 장군 기념사업에 적극 나서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안용복장군기념사업회를 적극 지원할 필요가 있다. 제향 때는 부산시장을 비롯한 부산지역 기관장들이 대거 참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어렵사리 안용복장군기념사업회 안판조 회장과 통화를 했다.
안판조 회장은 “현재 독도문제로 일본의 외교적 도발이 심각한데 지금이야말로 안용복 장군에 대해 부산시민들이 제대로 알아야 한다. 예전에는 6월 6일 현충일에 제사를 모셨는데 2001년부터는 안용복 장군이 귀양간 날인 4월 18일을 제향일로 잡았다. 기념사업회 차원에서는 현재 수영사적공원 주변에 터를 더 넓혀서 제대로 된 안용복장군기념관을 조성할 필요도 있고, 동구 좌천동에 장군의 생가복원, 미래세대를 위한 역사연구소나 한일교류 같은 것도 생각하고 있다. 안용복 장군뿐만 아니라 함께 도일한 동료 박어둔(朴於屯) 공 등 다른 지사들에 대한 연구, 선양사업이 필요한데 지금은 지자체에서 나오는 제사비용 외 지원이 없어 사업회 사무국 직원 한 명 두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경북도 출연기관인 사단법인 독도재단이 지자체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것과 대조돼 많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러한 기념사업회의 고민에 대해 부산시와 수영구, 동구청이 좀 더 뜻을 모아 고민을 함께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서 기념사업회를 범시민운동으로 확대해 나가면 좋을 것이다. 기념사업회는 1966년 3월에 『안용복장군 약전』을 간행했고, 4월에 ’죽도전말(竹島顚末)‘과 ’통항일람(通航一覽)‘ 초를 복사 간행했고, 그해 12월 『안용복 장군』을 간행했다.
둘째, 안용복 장군 기념 시설과 관련해 통일된 이미지 설정과 전국적인 네트워크 만들기가 필요하다. 지금 부산 동구 증산로 100에 건립된 안용복기념부산포개항문화관에는 ‘안용복 도일사 전시관’도 있고, 그 앞에는 부산항을 배경으로 안용복 장군이 일본으로 타고 갔다는 목선을 실물 크기로 복원해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선 안용복 장군의 생가터(매축지마을)도 조망하게 해놓았다. 그런데 명칭이 ‘그냥 안용복’이다. ‘안용복장군추모부산포개항문화관’이나 ‘안용복 장군 도일사 전시관’으로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우리나라에 있는 독도역사관을 네크워크화할 필요가 있다. 현재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도동항 인근에 안용복기념관(2013년 개관)이 있고, 울릉군 북면에는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2017년 개관)이 있다. 울릉도의 안용복기념관도 경북도에 조언을 해 ‘안용복장군기념관’으로 명칭을 변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또한 독립기념관 독도학교나 경북도의 재단법인 독도재단과 안용복장군기념사업회가 상호연대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부산항이 부산 출신의 애국지사 안용복 장군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작업에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
셋째, 안용복 장군의 동상이 부산지역 중심에 제대로 세워질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선 가장 바람직한 것은 현재 거론되고 있는 옛 부산진역사를 ‘안용복(장군)공원’으로 지정하는 것도 좋고, 아니면 북항 한 곳 공원을 ‘안용복(장군)공원’으로 지정할 필요도 있다. 동구청이 원하는 철도박물관을 추진하면서도 안용복(장군)공원을 함께 고민하면 답이 나올 것 같다. 아니면 현재 동구 초량동 옛 부산KBS 부지 인근에 있는 다대포첨사 윤흥신장군의 석상을, 논의를 거쳐 사하구 다대포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안용복 장군상을 세우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하구 다대동 윤공단에서 윤흥신장군 제향을 하고 있는 만큼, 현재 유동인구가 많은 다대포공원의 중심에 모시는 방법도 설득력은 있을 것 같다.
넷째, 안용복 장군의 기개와 나라사랑 정신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교육이 필요하다. 부산연구원이나 지역 대학의 역사학과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안용복 장군과 독도문제에 대한 연구가 일어나야 하고, 지자체가 이를 지원하는 시스템도 마련해야 한다. 지난 1월 부산교육청이 발간한 인성교육 교단지원자료 '부산의 인물'과 같은 책을 학생용이 아니라 시민용으로도 개발할 필요가 있다. ‘부산의 인물’에 실린 주요 인물은 독립운동가 박재혁 선생,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 의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한 안희제 박사, 송상현 동래부사, 마음으로 백성을 보살핀 강필리 동래부사,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킨 윤흥신 장군과 정발 장군, 독도를 지킨 안용복 장군, 조선시대 과학자 장영실 선생, 씨 없는 수박을 만든 우장춘 박사, 부산 야구의 전설 최동원 선수 등 30인이다. 앞으로 ‘부산의 인물’ 한 분 한 분을 부산의 역사브랜드로 삼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아가 해양관련 단체에서 안용복나라사랑아카데미 또는 안용복 해양아카데미와 같이 부산다운 시민강좌나 포럼을 이끌어갈 필요도 있다. 통일신라시대 청해진(현 전남 완도) 출신의 해상왕 장보고(張保皐, 787~846년) 대사(大使)와 같이 기념관을 넘어서 ‘해군 잠수함 장보고함’과 같이 ‘안용복함’도 나오도록 해야 하고, 우리지역의 관공서의 공간에 ‘안용복홀’ ‘안용복관’, 도로명도 ‘안용복로’가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우리는 왕조의 역사에서 ‘관존민비’의 폐해를 많이 보였다. 안용복 장군은 ‘평범한 보통사람이 위대한 시민’이 되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줬다. 안 장군의 뜻을 높이 사면 살수록 진정한 의미에서 진취적이고, 창의적이며, 시대정신을 앞서가는 시민들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동북아 해양수도 부산’ 만들기에 안용복 장군의 정신이 꼭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경성대 교수·환경경제학자, 소셜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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