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창 교수의 생태 이야기 (35)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 운동장에 논이 있는 학교

김 해창 승인 2022.09.09 20:42 | 최종 수정 2022.09.12 11:30 의견 0
코스모스가 핀 들판 풍경 [픽사베이]

추석을 불과 며칠 앞둔 시점에 초태풍 ‘힌남노’가 한반도를 할키고 갔다. 특히 포항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 침수사태로 인한 인명피해 소식은 전 국민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한반도를 덮친 태풍 중 큰 것들은 추석 전에 닥친 것이 많았다. 이제 한가위 차례도 예전과는 달리 많이 간소화되고 아예 차례를 지내지 않는 집들도 많아진 것 같다. 우리 집도 올해부터는 다례(茶禮)만 하기로 했다.

어릴 적 한가위의 추억이 떠오른다. 추석 때 갖고 싶었던 새 신발, 새 옷을 얻었을 때 그 기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부모님과 큰집, 외가를 찾아 집안 어르신들께 두루 인사를 드리고 용돈도 넉넉하게 받고 맛난 음식 신나게 많이 먹었던 날들. 우리 아이들 자랄 때만 해도 부지런히 명절이면 큰집, 외갓집을 바쁘게 오가며 몸은 녹초가 됐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조상에 대한 고마움과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덧 양가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시고 아이들도 장성했다.

추석은 농경시대의 풍습이다. 한 해의 결실을 조상들에게 고하는 일종의 ‘추수감사제’이다. 어릴 적 추석을 전후해서 열린 초중학교 가을 운동회는 그야말로 마을 잔치였다. 거기에는 기마전과 릴레이(계주) 그리고 대미를 장식하는 복주머니 터트리기가 있었다. 운동장 한 켠에는 아주머니들이 가마솥을 걸어놓고 소고기국밥을 내놓고 있었다. 이제는 아련한 옛 추억이지만 그래도 도시에 자라나는 아이들이 농업이나 농심(農心)을 조금이나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일본의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 만들어진 논.  

십여 년 전인가 일본 요코하마의 한 초등학교를 둘러본 적이 있다. 시모나가야초등학교라는 이 학교 운동장 축구 골대 뒤편에는 자그마한 논이 있었는데 이 학교 논은 한 때 일본 학교 생태교육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이 학교 운동장에 논이 만들어진 것은 역설적으로 대도시에 있는 이 학교 주변에 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역발상으로 교내에 논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지난 1999년 봄의 일이다. 이 학교는 학교 논 조성을 계기로 완전히 ‘자연생태학교’로 탈바꿈했다. 학교 논을 이용해 생물수업도 하고, 학생들이 모내기에서부터 추수까지 참여한다. 가을이 되면 직접 추수한 쌀로 떡을 만들어 학교 운동회 때 부모님과 지역주민들이 함께 참여해 동네잔치를 벌인다. 

이 학교는 또한 교내 곳곳에 작은 연못을 조성했는가 하면 기존의 학교 풀장도 여름철엔 학생들이 수영을 하고, 다른 계절에는 각종 곤충이나 식물들이 사는 ‘비오토프(Biotope)’로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하고 있었다. 풀장이 운영되는 여름엔 교실 큰 어항에 고기나 수초들이 자란다. 이 학교와 마을 사이의 언덕은 생태공원으로 만들어 사실상 담장을 없애 버렸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학교 논’이 방과후 프로그램 같은 ‘특활활동’이 아니라 ‘종합학습시간’이라고 하는 5학년 정규 교과 심화과정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학교 논의 면적은 가로 4m, 세로 8m로 32㎡에 불과하다. 논의 깊이는 80㎝ 정도로 바닥에는 방수시트를 깔아놓았다. 이러한 학교 논의 면적은 학생 한 명에 약 5포기의 벼 수확을 생각한 것인데 이는 밥 2공기 분량의 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 학교는 4월 하순이 되면 5학년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논갈이와 퇴비 넣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6학년으로부터 받은 볍씨 싹을 틔워 5월 하순에는 학생이 모두 나서 모를 심는다. 그때부터 모나 개구리 올챙이 송사리 등이 자라는 것을 관찰해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교실 어항에 올챙이 등을 기르기도 한다. 여름방학 땐 논 당번을 정해 논의 피를 뽑고, 잠자리, 사마귀, 거미 등을 보고 관찰일지를 쓴다. 8월 초순 이삭이 난 뒤에는 병충해 방지를 위해 애를 쓰고 10월 들어선 추수를 한다. 수확한 벼는 ‘사회과 자료실’로 옮겨 건조시키고, 직접 손으로 탈곡한 뒤 정미소에서 도정도 한다. 짚으로 공예를 하거나 쌀로 떡을 만드는 것도 직접 수업으로 연결된다. 이 학교의 사례는 지난 2002년 『학교 논의 재미있는 수업』이란 책으로 소개됐다. 

당시 오히라 시모나가야초등학교 교장은 “학교 논에는 아이들에게 계절감을 느끼게 하는 ‘세시기(歲時記)’가 있지요. 벼, 흙, 물, 생물 그리고 친구와 친해지는 것이야말로 학교 교육이 지향해야 할 바이죠.”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학교 논의 재미있는 수업을 한 번 만들어보면 얼마나 좋을까. 이래저래 제안을 해봤는데 대부분의 교장선생님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하셨다.

그린디자인으로 유명한 국민대 윤호섭 명예교수가 재직시절 대학 캠퍼스가 너무 아스팔트로만 돼 있는 것에 불만을 품고 학교에 건의해 일부 교내 도로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무우 배추밭’으로 만들어 학교식당에 식재로 활용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지만 학교에서 농(農)에 대한 교육은 제로에 가깝다.   

신지 이소야(進士五十八) 전 도쿄농업대학장은 『농(農)과 연결되는 녹지생활』(소학관, 2010)이란 책에서 현대인 모두가 어떠한 형태로든지 농업과 교감을 가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며 ‘전국민 제5종 겸업농가화’를 주장했다. 일본 농림수산성 통계에, 농가는 전업농가와 겸업농가로 나뉘어지며, 소득 중 농업수입이 많은 농가를 제1종 겸업농가, 농업수입이 적은 농가를 제2종 겸업농가라고 규정하고 있다. 신지 학장이 ‘제5종 겸업농가’라 이름붙인 것은 농(農)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①유농(游農), ②학농(學農), ③원농(援農), ④낙농(樂農), ⑤정농(精農)이라는 5가지 형태를 제시하면서 이 다섯 가지를 겸하는 삶이 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유농이란 가정채소밭이나 농원에서 놀이(레크리에이션)를 하거나 채소나 꽃을 가지고 노는 것을 말한다. 학농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음식이나 농업에 관해 배우면서 벼를 심거나 비오토프에서 환경학습을 하거나 농업체험을 하는 것이다. 원농은 좀 더 본격적으로 계단식 밭의 모내기나 동산의 풀베기작업을 돕거나 하며 농촌돕기 자원봉사활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낙농이란 자기텃밭이나 농원을 빌려 소일삼아 재미로 농사를 짓는 것을 말한다. 정농이란 농업을 주업으로 삼아 열심히 농사짓는 것을 말한다.

농심을 이해하는 데는 도시농업을 적극 지원할 필요가 있다. 도시농업이란 도시민이 도시의 다양한 공간을 이용하여 동식물을 기르는 과정에서 생산물을 활용하는 농업활동으로 도농교류를 통하여 농업인과 도시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 세계 각국의 도시농업은 19세기 중반 도시 빈곤층의 식량문제 해결이나 1·2차 세계대전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식량난 해결을 위해 확산됐던 것에 비해 최근에는 식량생산 이외에도 농업이 가지는 다원적 가치를 포함하는 활동으로서 그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백혜숙, 도시농업의 세계, 2012).

그 대표적인 것이 독일의 분구원(分區園;Kleingarten)이다. 직역하면 ‘작은 정원’인데 작은 구획으로 나눴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1919년 독일은 도시계획에 필수적으로 분구원을 설치하도록 했고, 1980년대 이후에는 생태공원 성격으로 전환됐다. 일본의 ‘시민농원’은 주말농장 형태의 농원으로 독일의 분구원제도를 받아들여 농작물 재배와 농사교육을 실시하는 것으로 1970년대 일반화되고 1990년에는 ‘시민농원정비촉진법’이 만들어졌다. 독일과는 달리 도농교류 촉진을 위해 농촌지역에 조성돼 농촌관광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도시농업이란 표현을 쓴 것은 2004년 (사)전국귀농운동본부였다. 귀농운동본부는 산하에 도시농업위원회를 두고 도시농부학교와 텃밭지도사 등 도시농업 보급 교육과 함께 시민텃밭 운동·도시농업 조례 만들기를 지원해왔다. 2011년 11월엔 ‘도시농업의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도시농업의 세계적인 성공사례는 쿠바를 들 수 있다. 쿠바의 ‘오가노포니코(Organoponicos)’는 도시의 빈터나 주차장, 아파트의 베란다 등을 활용한 집약적 텃밭농장을 말한다. 쿠바는 1990년 전후 미국의 해상봉쇄와 소련 붕괴로 원조가 끊기자 원유와 생필품 공급중단으로 발생한 심각한 식량난의 대안으로 도시농업과 유기농법을 도입했다. 쿠바 정부는 기존 단작 중심의 대농장체계의 토지를 개인이나 협동조합에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분배하는 토지개혁을 실시했으며 동시에 산업화로 훼손된 토양개선을 단행했고 지렁이농법, 순환농법, 지역토양연구소의 네트워크화 등을 주요사업으로 진행했다. 쿠바는 휘발유가 부족하자 트랙터 대신 40만 마리의 소를 길러 우경(牛耕)으로 전환했고, 화학비료와 농약이 부족하자 전국 230여 곳에 포식·천적재생산센터(CREE)를 세워 천적을 이용해 병충해를 구제하는 농법을 개발했다. 도시농업 덕분에 쿠바는 1992년 당시 40%였던 식량자급률을 10년 뒤엔 110%로 끌어올렸다. 더욱이 육류에서 채식 위주로 식생활이 바뀌었고, 병원 출입 환자수가 30%나 줄어들었으며, 영아사망률은 미국보다도 낮아졌다. 당시 쿠바는 학교에서도 ‘한 손에는 책, 한 손에는 호미를’이라며 농업이해교육을 실시했다(국제신문·2006년 11월 26일).

김해창 교수

기후위기 시대 땅에 대한 고마움, 농업의 중요성을 모두가 깨달아야 한다. 비록 몸은 도시에 살더라도 자연과 생명의 관계를 느끼고 자신의 존재를 깨달으며 ‘대지’ 또는 ‘농업’과 연관을 지속적으로 맺는 생활이 인간에게는 근원적으로 필요하다. 자라는 아이들에게 자연친화·농업친화적인 교육이 학교의 장에서 펼쳐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성대 환경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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