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흑백사진은 무채색이 아니다 / 홍성주

홍성주 승인 2021.01.27 19:46 | 최종 수정 2021.01.28 11:17 의견 0

한 장의 낡은 흑백사진을 본다. 사진 속에서 한 노인이 그림처럼 웃고 있다. 그 옆에는 옆모습의 내가 있다. 무심코 오래된 책을 들추다 책갈피에서 툭 떨어져 나온, 희미하게 빛바랜 한 장의 사진이다. 사진을 주워 들고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기억이 초가집 작은 굴뚝에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되살아났다.
 
벌써 오래전 일이다. 지인이 운영하는 요양원 비슷한 곳에서 잠시 일을 한 적이 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고급 실버타운쯤 되는 것 같다. 첫아이 출산 후 잠시 쉬고 있던 때였다. 처음으로 개원하면서 도움을 청하는 지인에게 나는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거리가 먼 시골에 있다 보니 버스를 타고 두 시간 정도를 오고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버스에서 내려 외진 마을을 끼고 걸어야 했다. 고즈넉한 산속에 둘러싸인 공기 좋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유독 기억나는 한 사람은 사진 속의 노인이다. 그는 늘 침대 안에 있었다. 거동이 불편하여 화장실에 가는 일도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항상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았으며 말을 아꼈다. 곁에 앉아 내가 나지막한 소리로 책이라도 읽고 주면 그는 늘 눈을 감고 들었다. 그는 성경의 시편과 잠언서를 즐겨 듣고 싶어 했다. 다른 방의 이웃들이 찾아와 함께 이야기꽃을 피울 때도 대부분 듣고만 있었다. 간간이 건네는 그의 미소가 그러한 시간들을 더 밝게 만들었던 것 같다. 찾아오는 이가 없는 시간에는 대부분 잠이 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을 감고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홀로 맞는 시간들을 자신만의 흑백의 추억으로 그는 지나온 삶을 회상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가끔씩 모퉁이 길을 돌아 오토바이의 진동을 일으키며 찾아오는 집배원만이 외부인이다. 하지만 이곳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줄 반가운 소식을 가지고 오지는 않았다. 이들도 자신들에게 찾아올 어떤 소식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나 기다림은 가지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하루하루의 날들이 그들에게는 무채색처럼 지나갔다.
 
가랑비 내리는 어느 초라한 가을날, 사진 속 노인의 보호자가 방문을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의 방을 찾았다. 아들 부부가 찾아왔는데 얼굴이 익숙하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부탁하던 그의 모습은 매우 진지하고 정중했다. 그들의 아름다운 만남을 위해 나는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 방을 나왔다. 길지 않은 시간 후에 아들 부부가 돌아가고 다시 그의 방을 찾았다. 방문을 여는데 노인은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숨소리마저 감추며 흐느끼고 있었다. 그의 체읍을 영원히 알지 못한 채 그들의 아버지를 떠나보내지 않았으면 좋았으련만.
 
한 번도 자식들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던 노인은 내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아들과 손자들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하지만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자신을 돌볼 사람이 없기에 어쩔 수 없음을 슬퍼했다. 자신의 노년과 삶의 뒤안길을 절절히 가슴 아파했다. 그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음을 서럽도록 안타까워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노인분들이 요양원에서 보내는 것이 스스럼없지 않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늙어가고 또한 죽음을 향하여 가는 존재인 것을 때때로 잊고 산다. 문득 이러한 현실 앞에 한없이 겸손해진다. 오래전 잊고 있던 한 장의 사진이 전해 주는 흑백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점점 노인인구가 늘어나며 노인문제가 사회적인 쟁점으로 다가오는 것이 이제는 타인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우리의 삶을 마무리함에 있어 한계를 느끼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며 살아가는 지혜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나의 삶도 낡을수록 소중한 한 장의 흑백사진으로 남겨질 수 있기를 조심스럽게 바라본다.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앞에 나는 겸허한 마음의 문을 조심스레 열어 놓는다.
 
흑백사진은 무채색이다. 그러나 무채색만은 아닌 것 같다. 그만이 가진 색깔은 무한하다. 또한 보는 이의 끝없는 상상을 자극하기도 한다. 그 한 장에 담긴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나름대로의 색깔로 폴폴 흘러나온다. 오래전으로 돌아가 만나볼 수 있도록 형언할 수없이 설레는 감정과 감동을 차곡차곡 쌓아 놓는다. 한줌 눈물과 입가에 절로 번지는 미소를 함께 전해준다. 추억은 때때로 신비로운 심연의 바닷속 여행을 선물하는 것 같다.
 
문득 발견한 한 장의 빛바랜 흑백사진은 잊고 있던 이전의 기억들을 불러오기도 한다. 소중한 나만의 이야기들은 어디쯤에서 그토록 많은 시간들을 기다리며 참고 있었던 것일까. 보이지 않는 유채색을 마음껏 덧칠할 수도 있는 흑백사진은 오래된 과거의 소박한 기록이다. 세월의 아련함이 배어있다. 천천히 다가오는 설렘으로 기다림 뒤에 얻는 애틋함이 되살아난다. 또한 희미한 기억을 아름다움으로 전해 주기도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낡은 피사체의 색감이 깊은 내면에 벅차오름을 안겨준다. 흑백의 사진은 비움과 채움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우리네 삶도 때로는 한 장의 남겨진 흑백사진과 같지 않을까. 누군가는 총천연색의 화려한 삶을 사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살다 가는 사람도 흑백사진이 주는 아련함처럼 충분히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가물거리는 기억 밖으로 걸어 나온 흑백의 이야기가 지그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낡은 한 장의 사진 속에서.

홍성주 작가
홍성주 작가

◇홍성주 작가는

▷2020년 새한일보 신춘문예 수필 부문 당선(당선작 「비버의 달」)
▷《문장 21》(통권 제 51호) 수필 부문 신인상
▷대한시문학협회 정회원, 한양문학 정회원, 동인지 《시야시야》 정회원

 

 

▶「흑백사진은 무채색이 아니다」를 읽고

마음가는 대로 그냥 쓰면 되는 게 수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만큼 큰 오산은 없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수필은 허구가 아니라 사실적 경험과 작가의 체험이 일정부분 가미된 장르이다. 그래서인지 수필을 쉽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도 공감하지만 본 기자는 절대로 쉬운 글은 없다라고 규정하고 싶다. 붓 가는 대로 마음가는 대로 그냥 쓰면 되는 게 수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만큼 큰 오산은 없다.
 
흔히 알고 있는 좋은 수필은 시와 마찬가지로 정확한 메시지가 있어야 하고 문법이나 문장의 연결이 깔끔해야 하며, 작가 정신에 입각하여 소재를 바라보는 시선이 맑고 신선해야 한다. 어떤 데이터나 수치에 기인한 글은 수필이라 볼 수 없다라고 누차 이야기를 했던 점도 수필의 기본틀을 벗어나는 글을 쓰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음을 독자들도 이해했으면 좋겠다.
 
오늘은 홍성주 작가의 수필 「흑백사진은 무채색이 아니다」를 읽으며 작가의 문학정신에 빠져보도록 하려한다. 수치나 데이터가 나올 법한 문장에서도 작가의 인내심으로 만들어 낸 활자의 연결음을 눈으로 보고 홍성주라는 작가의 작품성을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현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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