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道无知)의 채근담 읽기 (61) 학자라면 먼저 조신하는 마음가짐 위에 아울러 활달한 멋도 갖춰야 할 것이다

허섭 승인 2021.03.01 19:11 | 최종 수정 2021.03.02 10:20 의견 0
겸재(謙齋) 정선(鄭敾 조선 1676~1759) -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79.2×138.2), 리움미술관

061 - 학자라면 먼저 조신하는 마음가짐 위에 아울러 활달한 멋도 갖춰야 할 것이다 

학문하는 자는 일단의 조심(操心)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또한 한편으로는 활달(豁達)한 멋이 있어야 한다.

만일 오로지 단속하고 결백하기만 하다면
이는 가을의 숙살(肅殺)만 있고 봄의 생기(生氣)가 없는 것이니
무엇으로 만물을 발육할 수 있겠는가?

  • 要有(요유) : ~가 있어야 한다. ~해야 한다.
  • 兢業(긍업) : 조심스럽고 신중함.  兢兢業業의 준말이다.
  • 瀟灑(소쇄) :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고 활달함.  灑는 洒(물뿌릴 쇄)와 같은 뜻이다.
  •   * 담양에 있는 소쇄원(瀟灑園)의 그 ‘소쇄’ 이다. - 전집 제6장과  제106장 참조.
  • 一味(일미) : 한결같이, 오로지, 외곬으로.
  • 斂束(염속) : 거두어 졸라맴, 거두어 단속함.
  • 淸苦(청고) : 지나치게 청렴함.
  • 秋殺(추살) : 가을의 싸늘한 기운. 숙살(肅殺)한 기운.  
  •   * 肅殺之氣(숙살지기) : 풀이나 나무를 말려 죽이는 쌀쌀하고 매서운 기운.
  • 春生(춘생) : 봄의 생동하는 기운, 만물을 소생시키는 따뜻한 기운.
  • 何以(하이) :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무엇으로 ~하겠는가, 어찌 ~하겠는가?
061 고상(高翔 청 1688~1753) 매화도 88.8+44.7 북경고궁박물원
고상(高翔, 청, 1688~1753) - 매화도

대체 어쩌란 말이냐? - 오로지 중정(中正)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채근담』을 읽다 보면 ‘너무 ~하지도 말며 또한 너무 ~하지도 말라’ 는 서로 상반되고 모순된 언명(言明)과 언질(言質)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제가 스무살의 젊은 시절에  채근담을 읽다가 던져버린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때로는 양비론(兩非論)적인 입장이기도 하고 때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현실 타협적 처신을 말하기도 하여 시비(是非)와 호오(好惡)를 명확히 하고자 했던 젊은 시절에 채근담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채근담을 번역하면서도 주 독자층을 50대 이상에 초점을 맞추게 된 것입니다. 『채근담』은 최소한 인생을 반백년은 살아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책입니다.

『채근담』의 여러 주제들을 살펴보면 ‘담박(淡泊)함’ 과 ‘연비어약(鳶飛魚躍)’ 으로 표현한 ‘정중동(靜中動)’ 의 경지 등을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말한다면 바로 ‘중정(中正)’ 즉 중용(中庸)일 것입니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서 비롯한 말로 『중용(中庸)』 에서는 도(道)를 두고 < 一陰一陽謂之道(일음일양지위도) - 한번은 양이 되고 한번은 음이 되는 것을 두고 도라고 한다. > 고 했습니다. 저는 이를 두고 ‘장자(莊子)의 변증법’ 이라 부릅니다. 서양의 ‘헤겔의 변증법’ 이 정반합(正反合)의 논리라면, 동양의 장자의 변증법은 항시 양 극단을 오가는 ‘진동의 추 - 시계 불알’ 의 논리입니다. 그리하여 헤겔의 변증법이 진보(進步)의 개념을 가질 수 있다면 장자의 변증법은 언제나 그 자리 일 수도 있습니다. 헤겔의 변증법이 그가 상정한 절대정신을 향해 치닫고 있지만 우리는 그 방향성을 알지 못하는 데 반하여 그러나 장자의 변증법은 그 자리가 언제나 제자리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一陰一陽 하기 때문입니다. 

괘종시계의 불알은 시계의 정중앙(수직 축선 상)에 위치해야 추가 계속 살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계불알이 정중앙에 그대로 있다면 시계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멈추게 됩니다. 시계불알이 좌우의 양 극단을 오고가야 시계는 멈추지 않고 살아 있는 것입니다. 시계 불알은 이쪽 끝에서 내려오는 힘으로 저쪽 끝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一陰一陽이 곧 道라는 것입니다.

우주는 한없이 팽창하고 있으며 세상은 끝없이 변화해 갑니다. 세상이 변화하는데 한 자리만 지키고 있다면 그것이 진리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남(正南)을 가리키는 나침반의 바늘 끝이 파르르 떨고 있는 것은 지구가 자전을 하고 있다는 증표입니다. 바늘 끝이 떨리지 않는 나침반은 이미 죽은 나침반입니다. 

중정(中正)은 음과 양의 양극을 오가면서도 언제나 그 가운데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바뀌어도 언제나 가장 알맞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에 그 때에 가장 알맞은 것 - 그 상황에서 맞는 가장 바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우리는 ‘時中(시중)’ 이라 일컫는 것입니다. 

允執厥中(윤집궐중) - 진실로 그 가운데를 잡을 지어다.

<배움의 공동체 - 학사재(學思齋)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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