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 독서는 자구(字句)나 형식에 매이지 않고 그 사상을 읽어야 하며, 사물을 관찰함에는 형상에 매이지 않고 그 실상을 보아야 한다.
독서를 잘하는 사람은
책을 읽어 저절로 덩실덩실 춤이 나오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자구(字句)나 형식(型式)에 얽매이지 않는다.
사물을 바로 보는 사람은
마음과 정신이 사물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사물의 겉모습에 사로잡히지 않게 된다.
- 善(선) : 잘하다. * 善射(선사) : 활을 잘 쏘다.
- 要(요) : ~해야 한다. ~가 필요하다.
- 手舞足蹈(수무족도) : 너무도 기뻐 절로 춤이 나오는 모양.
- 方(방) : 마침내, 비로소.
- 筌蹄(전제) : 筌은 물고기를 잡는 통발, 蹄는 토끼를 잡는 올무. 전(轉)하여 ‘수단이나 도구’ 를 뜻함.
- 心融神洽(심융신흡) : 마음과 정신이 사물과 하나가 됨.
- 泥(니) : 원래 ‘진흙, (진흙에 빠져) 헤어나지 못함’ 을 뜻하나 여기서는 ‘막히다, 구애(拘碍)되다’ 의 의미로 쓰인다.
- 迹象(적상) : 자취와 모양, 즉 ‘사물의 외형’ 을 말함.
◈ 『맹자(孟子)』 이루편(離婁篇) 상(上)에
樂則生矣(낙즉생의) 生則惡可已也(생즉오가이야) 惡可已(오가이) 則不知足之蹈之(즉부지족지도지) 手之舞之(수지무지)
- 즐거워하면 악(흥, 생기)이 일어나고 악(흥, 생기)이 일어나면 어찌 그칠 수 있겠는가? 그칠 수 없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절로 발이 덩실덩실 손이 너울너울 춤을 추게 된다.
* 여기서 惡는 ‘어찌 오’ 로 풀이해야 한다.
* 『예기(禮記)』악기편(樂記篇)에도 ‘不知手之舞之 足之蹈之也’ 라는 구절이 보인다.
◈ 『장자(莊子)』 외물편(外物篇)에
筌者所以在魚(전자소이재어) 得魚而忘筌(득어이망전), 蹄者所以在兎(제자소이재토) 得兎而忘蹄(득토이망제). 言者所以在意(언자소이재의) 得意而忘言(득의이망언). 吾安得夫忘言之人(오안득부망언지인) 而與之言哉(이여지언재)!
- 통발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것이니 물고기를 잡고난 뒤에는 통발을 잊어버리며, 덫은 토끼를 잡기 위한 것이니 토기를 잡고 난 후엔 덫을 잊어야 한다. 말은 뜻을 표현하는 도구이지만, 뜻을 표현하고 나면 잊게 된다. 우리는 어찌하면 말을 잊은 사람들을 얻어(만나) 그들과 얘기를 할 수 있게 될까!
※ 장자의 이 비유는 ‘강을 건넌 후에도 뗏목을 지고 가는 이의 어리석음’ 을 풍자한 것이다.
◈ 『사유경(蛇兪經)』- 뗏목의 비유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 가운데 ‘사유경(蛇兪經)’ 에는 유명한 비유가 나온다. 석존이 기원정사에 있을 때의 가르침이다.
제자 가운데 독수리 잡기를 좋아하는 비구가 있었다. 그는 나쁜 소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아니타였다. 대중들이 그의 그릇된 소견을 고쳐 주려고 타일렀지만 아무런 보람이 없었다. 이 말은 전해들은 석존은 조용히 아나타를 불러 타이른 후 대중에게 말했다.
“비구들이여, 나는 너희들에게 집착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서 뗏목의 비유를 들어 말해주겠다. 어떤 나그네가 긴 여행 끝에 강가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생각하기를 ‘바다 건너 저 쪽은 평화로운 땅이다. 그러나 배가 없으니 어떻게 갈까. 갈대나 나무로 뗏목을 엮어 건너가야 겠군.’하고 뗏목을 만들어 무사히 건너가 평화로운 땅에 이르렀다. 나그네는 다시 생각하였다. ‘이 뗏목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이 강을 건너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뗏목은 내게 큰 은혜가 있으니 메고 가야겠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나그네가 그렇게 함으로써 그 고마운 뗏목에 대해 자기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느냐.”
석존의 질문에 제자들은 하나 같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스승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나그네가 어떻게 해야 자기 할 일을 다 하게 되겠느냐. 그는 강을 건너고 나서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뗏목으로 인해 나는 강을 무사히 건너왔다. 다른 사람들도 이 뗏목을 이용할 수 있도록 물에 띄어 놓고 이제 내 갈 길을 가자.’ 이와 같이 하는 것이 그 뗏목에 대해 할 일을 다 하게 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뗏목의 비유로써 교법(敎法)을 배워 그 뜻을 안 후에는 버려야 할 것이지, 결코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했다. 너희들은 내가 말한 교법까지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하물며 법 아닌 것이야 말 할 것 있겠느냐.”
◈ 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 선생의 <덩실덩실>
류영모 선생이 연경반 강의실로 쓴 건물은 넓이가 서른 평 남짓하였는데, 일자로 된 긴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맨바닥에 앉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앞에는 교탁이 있었고 중형 칠판도 걸려 있었다. 물론 마이크 장치는 없었다. 그러나 공간이 작고 선생의 음성이 힘차서 강의를 듣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강의 교재는 류영모 선생이 일기장에 적어놓은 자작 시조나 한시가 주를 이루었다. 아니면 동양 고전의 원문을 다루었다. 강의 방식은 가르칠 내용을 모조지에 손수 붓글씨로 써 와서 칠판에 붙여놓고 읽으며 설명하는 식이었다.
강의에서는 선생의 해박한 지식과 독창적인 생각, 그리고 오랫동안 쌓은 경험이 조화를 이루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영감이 샘솟아 신명이 나면 자작한 시조나 한시에 가락을 붙여서 노래처럼 읊었다. 때로는 맹자(孟子)의 말처럼 수지무지족지도지(手之舞之足之蹈之)하여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기도 하였다.
어떤 어려움에 놓여도 하느님 생각만 하면 기쁨이 샘솟아야 참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가 보여준 믿음이 바로 그런 믿음이었다. 삶은 기쁨이라고 한 선생의 말은 고달픈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 박영호 선생「다석 류영모의 YMCA 연경반 35년」중에서
<배움의 공동체 - 학사재(學思齋)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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