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서평 - 감정이 지배하는 사회
저자 : 세바스티안 헤르만
서평자 : 김학진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미국 위스콘신주립대학교(매디슨) 생물심리학 박사)
감정의 원인을 살펴야 하는 이유
인저리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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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30 16:27 | 최종 수정 2020.04.30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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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과 불운은 대부분 극단적인 사례이거나 아주 가끔 일어나는 사고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재앙과 불운의 이미지들은 우리 머릿속에 깊이 박혀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왜곡시킨다.” (p. 164)
세계를 휩쓴 코로나바이러스는 불과 3달 남짓한 짧은 시간 만에 일상의 거의 모든 것들을 바꾸어 놓았다. 익숙했던 삶이 사라지고 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언제나 불안함과 두려움이고 이런 감정들은 애써 부정하고 멀리해왔던 보고 싶지 않은 내 모습들을 하나씩 들추어낸다. 흔들리는 전철 위에서 콜록거리며 기침하는 누군가를 보고 거의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재빨리 자리를 떠나기도 하고, 어떤 감염자가 주변 사람들을 전염시켰다는 뉴스를 접할 때면 그 사람을 포함해 그 가족까지 비난하며, 나의 이 비난을 정당화시켜주는 뉴스 기사들에 온 촉각을 곤두세운다. 이처럼 불안함과 두려움이란 감정은 내 삶의 크고 작은 모순들을 가리기 위해 그동안 하나씩 걸쳐 입었던 많은 옷들을 한 번에 모두 벗겨내고, 그 뒤에도 난 놀라울 만큼 당당하다.
내가 “감정이 지배하는 사회”를 받아든 시기는 올 3월 이미 코로나바이러스가 전국적으로 크게 확산된 이후였다. 매일 터지는 극단적인 뉴스들에 휩쓸려 감정이 요동치던 시점에 내 손에 들어온 이 책은 마치 오래 전에 이미 앞으로 다가올 이 사태를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지난 몇 주 간의 내 감정의 변화들을 덤덤하게 진단하며 적나라하게 발가벗겨 놓고 있었다. 사실 내가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오히려 이 사실은 감정의 거대한 소용돌이 앞에서 너무나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나를 더 또렷이 볼 수 있게 해주어 불편했다.
이 책은 우리가 ‘이성’을 거쳐 판단 혹은 결정했다고 믿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나의 왜곡된 사고의 결과물일 수 있음을 많은 심리학 연구결과와 이론에 개인적인 경험과 실제 사례들을 덧붙여 이해하기 쉽게 잘 전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왜 우리는 항상 우리가 듣고 싶은 이야기에만 귀 기울이게 되는지, 왜 단순히 익숙하고 친숙하다는 이유만으로도 어떤 대상에 대해 더 끌리게 되고 혹은 더 진실이라고 믿게 되는지, 왜 가짜뉴스는 진짜 뉴스보다도 더 빠르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는지, 왜 사람들은 자신이 소속된 집단에 동조하며 그 집단을 위해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는지.
이런 내용들은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들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진단할 수 있게 해주고 그 속에서 숨 가쁘게 살아가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저자는 여기에 개인적인 경험과 적절한 실제 사례들을 잘 섞어서 흥미로운 이야기처럼 들려주지만, 이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자신의 현재 경험이나 과거의 유사한 사례들을 떠올려 본다면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을 듯하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불편했던 부분은 바로 혐오감에 대해 설명하는 아래 문장이었다.
“(페미니즘이나 여성혐오와 같은) 이러한 신념들은 채워지지 않은 꿈에 대한 좌절감을 견딜 수 있게 만들어주며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과 양심을 경감시켜준다.” (p. 139)
어떤 대상이나 집단에 대한 분노 혹은 혐오의 이면에는 나의 욕구, 수치심, 혹은 두려움이 숨어있을 수 있다. 이런 감정들의 원인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것은 때로는 너무나 힘들고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감정들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과 방식으로 잘 재단하곤 한다. 그리고 이렇게 재단해서 만든 옷이 너무나 그럴듯해 보이면 이는 어느새 대단한 자신감으로 변모하여 거리를 뽐내며 누비고 싶어진다. 내 분노는 정당하다는 자신감이 느껴질 때 오히려 역설적으로 내 이성은 흔들릴 수 있으며,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자신감 뒤에 숨겨진 욕구나 두려움을 들여다보는 용기일 수 있다.
사실 감정을 부정적으로만 묘사하고 감정과 이성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서로 대립되는 실체로 보는 것은 최근 학계의 견해와 다소 거리가 있다. 감정은 이성으로 억눌러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적 사고를 가능케 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최근 많은 뇌과학 연구들이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감정은, 고정관념이나 편견처럼 습관적으로 굳어진 편향된 생각과 행동을 가리킨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하다. 현재 뇌과학에서는, 지금까지 익숙했던 생각이나 행동이 현재 상황과 잘 맞지 않을 때, 이를 감지한 신체가 뇌로 보내는 신호를 감정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감정이 발생할 때 그 원인을 잘 따라가는 것은 오히려 생각의 습관적 패턴을 파악하고 수정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이성이란 어떤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습관적이고 편향된 신념을 인식하고 이를 수정하려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신념 뒤에 숨겨진 감정들을 끄집어내서 직시하려는 태도야말로 이성을 추구하는 삶에 가까워지는 길일지 모른다.
# 이 서평은 국회도서관의 승인을 받아 '금주의 서평'을 전재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www.nanet.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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