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서평 - 한국인 이야기 : 탄생 - 너 어디서 왔니
저자 : 이어령
서평자 : 김기태(세명대학교 디지털콘텐츠창작학과 교수, 경희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졸업, 정치학 박사)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우리 문화 유전자의 암호 풀기
인저리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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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0 14:07 | 최종 수정 2020.06.20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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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과거다. 내가 훗날 부모가 되면 부모의 과거였던 시간이 내 훗날 미래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옛이야기의 의미다. 수천 년을 이어온 옛이야기. 그때 내 말이 있었고, 내 말이 또다시 수천 년을 이어 아이의 옛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옛이야기를 들은 아이는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바뀌고, 그 아이의 아이로 또다시 이어진다. 과거가 미래가 되고, 미래가 또다시 과거가 되어 미래로 탄생한다.” (p. 381~382)
역시 입담의 대가답다. 400쪽이 넘는 책을 단숨에 읽어본 게 얼마 만일까. 이어령. 1970년대 교과서에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만난 이래 멀리서 가까이서 듣거나 읽으면서 그 이름을 기억한 지도 꽤 오래됐건만, 구순을 바라보는 연세에 이러저러한 투병 소식에도 여전한 입담이라니… 그만큼 건강하시다는 증거라고 보면 반갑고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강단에 설 때마다 요즘 젊은이들이 ‘개념’이 없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이 책은 요즘 젊은이들에게 ‘개념’을 일러줄 엄두조차 못 냈던 나 자신을 자괴의 늪으로부터 구해줄 방도가 아닐까 싶다. 읽는 동안 불끈 솟아오르는, 뜻도 모른 채 읊조렸던 수많은 우리말에 대한 경외심만으로도 이 책은 값진 선물로 다가온다.
저자는 ‘아라비안나이트’에 빗대어 “한국에는 한국의 밤이 있고 밤마다 이어지는 이야기”로서 ‘꼬부랑 할머니의 이야기’가 있음을, 그리하여 ‘한국인 이야기’의 탄생은 꼬부랑 열두 고개에서 펼치게 되었음을 선언한다. 본문을 시작하기 전에, 그리고 본문이 끝난 후에 덧붙은 글의 제목이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개를 넘어가는 이야기”로 간다는 점도 아마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노구의 저자가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집필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셰에라자드’의 심정으로 날마다 고치고 고친 끝에 세상에 나온 책이고 보면(『한국인 이야기』는 모두 12권으로 기획되었다니 아직 11권이 더 남았다!) 자간마다 행간마다 저자의 숨결이 안 닿은 곳 없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이 책의 저술에 그토록 혼신을 다한 것일까. 원래 이 책은 “한국인의 탄생에서 그 죽음에 이르는 끝없는 생명과 문화의 순환, 그 시간과 공간의 너울에서 건져낸 낯설고도 친숙한 이야기들”을 통해 한국인 문화 유전자의 모든 암호를 풀어낼 목적으로 시작한 작업의 일부였다. 책 표지를 감싸고 있는 띠지에 새겨진 바와 같이 “너 어디에서 왔니? 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라는 문장 속의 ‘그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눈여겨본 결과물이기도 하다. 작가를 ‘지우개 달린 연필’에 비유하며 “쓰고 지우고 지우고 쓰는 것이 업”임을 말하는 노학자에게 이 책은 필생의 ‘업’이었으리라.
태내에서부터 시작하여 여섯 살 때까지의 기간을 다룬 이 책은 앞쪽 뒤쪽 자투리 글을 빼고 모두 12개의 장으로 이루어진다. 꼬부랑 할머니의 꼬부랑 열두 고개에 빗대어 제목마다 ‘고개’가 들어간다. 제목만으로도 어떤 이야기일지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이를테면 이렇다. 1. 태명 고개: 생명의 문을 여는 암호, 2. 배내 고개: 어머니의 몸 안에 바다가 있었네, 3. 출산 고개: 이 황홀한 고통, 4. 삼신 고개: 생명의 손도장을 찍은 여신, 5. 기저귀 고개: 하나의 천이 만들어낸 두 문명, 6. 어부바 고개: 업고 업히는 세상 이야기, 7. 옹알이 고개: 배냇말을 하는 우주인, 8. 돌잡이 고개: 돌잡이는 꿈잡이, 9. 세 살 고개: 공자님의 삼 년 이야기, 10. 나들이 고개: 집을 나가야 크는 아이, 11. 호미 고개: 호미냐 도끼냐 어디로 가나, 12. 이야기 고개: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처럼 우리 한국인이 세상에 태어나는 과정 그리고 자라나는 과정을 열두 고개에 빗대어 적나라하게 드러낸 저술이 또 있을까 싶다. 어릴 적 생각으로 사람 이름을 왜 저리도 망측하게 지었을까, 한자(漢字)로 어미와 아비를 뜻하는 말[父母]이나 딸·아들을 뜻하는 말[子女]은 어떻게 생겨난 걸까, 산모는 왜 미역국을 저리도 열심히 먹는 걸까,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왜 삼신할미가 몽고반점을 만들어준 걸까, 집집마다 없는 집이 없었던 포대기는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민요에 자주 나오는 ‘아리랑’과 ‘쓰리랑’은 무슨 뜻일까 등등 궁금한 것 투성이였는데… 그처럼 풀릴 길 없던 궁금증이 책을 읽고 나자 순식간에 풀리는 경험이 시원했다.
어디 그뿐인가. 꼬부랑 열두 고갯길마다 옆으로 새는 길이 있다. 고갯길로 다시 돌아오지만 ‘샛길’에 들러보아도 읽는 재미가 솔솔하다. ‘막문화 막이름’을 필두로 ‘언제부터 태명이 시작되었나’, ‘부르지 못하는 이름, 기휘’, ‘성을 중시하는 아시아, 이름을 중시하는 유럽’ 등 쉬어가기 맞춤인 샛길이 수두룩하다. 이렇게 즐비한 열두 고개와 사이사이 샛길을 두루 들르고 넘어가노라면, 그리하여 “아주 맛있게 먹었다”가 “아주 멋있게 살았다”로 바뀌는 우리말의 마법을 깨닫는다면, 우리 한국인의 태생에 얽힌 “너 어디에서 왔니?”라는 질문에 흔쾌히 대답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 이 서평은 국회도서관의 승인을 받아 '금주의 서평'을 전재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www.nanet.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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