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옹(進翁) 시인의 간월산 산책 (19)보물370호 석조여래좌상
인저리타임
승인
2020.05.13 14:24 | 최종 수정 2020.05.13 14:46
의견
0
이제 간월사지의 중심적 유물이자 유일한 보물이며 사실상 주인인 석조여래좌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겠습니다.
간월사 옛터에서 유일하게 온전히 남은 건물인 석조여래좌상전의 건물은 그렇게 크고 멋진 부처를 모셨음에도 크고 엄중한 사찰의 느낌이 나지 않고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나 대중들의 공양처처럼 나지막하고 긴 건물이 여기 여래좌상을 모실 때까지만 해도 신라의 국력나 불교가 그리 융성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거기다 지금 금당터로 불리는 넓고 큰 대웅전에 엄청 장엄한 부처를 모시고 여기엔 사랑채처럼 작은 건물에 앉은뱅이부처(여래좌상)을 모신 것 같기도 하고요.
우선 석조여래좌상을 우리말로 풀면 '돌로(石造) 부처님의 앉은 모습(여래좌상如來坐像)'을 만든 부처입니다. 우선 여래좌상의 외관을 설명하자면 맨 아래 사각형의 돌은 기단(基壇)이며 그 위에 동그란 연꽃무늬 받침대 3개가 있는데 두 번째 아래로 엎드린 것을 복련(伏蓮), 첫 번째와 세 번째의 위로 보는 모습을 앙련(仰蓮)이라고 합니다. 복련이 부처의 동체와 같은 색이고 앙련이 색깔이 옅은 것은 이 절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또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어 일부 파손되거나 사라진 것을 훗날에 복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보다 세심히 살피면 부처의 얼굴과 동체의 색이 약간 다르다는 걸 느낄 수가 있는데 그 역시 여래좌상이 여러 번 훼손되면서 부처님의 두상(頭像)을 파손한 걸 다시 복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 여기에서 부처님의 얼굴에 주목해기로 합니다. 통일신라를 지나 고려,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우리나라의 부처는 대체로 얼굴이 좀 길거나 볼의 측선(側線)이 조금 부풀은 매우 후덕하고 인자한 모습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양 귀가 크고 긴 형태(대표적인 것이 석굴암 부처님과 은진미륵상)인데 이 부처의 얼굴은 마치 서양의 미인처럼 날렵하고 반듯하여 그야말로 8등신 '미로의 비너스' 상과 닮았습니다.
이 황당한 사실을 규명하려면 여기서 우리는 불교와 기독교의 접점(接點)을 살펴야하는데 이 부처의 얼굴이 바로 미로의 비너스 상(像)을 본뜬 성모(聖母)마리아 상을 모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지 모르지만 인도와 중국의 초기 불교에는 원래 불상(佛像)이 없었답니다. 그러다 동서양의 인종과 문화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진 소년황제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의 캐시미어지방까지 진출하다 병사(病死)한 일이 있는데 부처상은 그때 그리스인(알렉산더는 그리스의 마케도니아인임)의 아프로디테(로마신화의 비너스) 여신상에 로마기독교의 마리아상이 혼합된 전형적 서구미인의 형태로 인도로 묻어와 그 유명한 '간다라미술'로 자리 잡게 됩니다. 바로 그 간다라미술이 신라까지 흘러온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부산 금정산 만덕동에 병풍사로 불리다 석불사로 불리는 절 뒤 암벽에 조성된 일군(一群)의 부처상이 바로 간다라미술의 전형인 것입니다.
이 쓸쓸한 폐사의 부처와 장승에서 로마와 그리스, 폐르시아와 성모 마리아까지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참으로 오묘한 세상의 이치, 부처님의 배품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전쟁과 무역을 통해 낯선 사람들끼리 만나 교류하고 사랑하며 혼혈아와 문화접촉을 통해 조금씩 변화와 발전을 거듭한 것, 그야말로 〈위 아더 월드(We are the world)〉인 것입니다.
<시인·소설가>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