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리(平里) 선생의 명촌리 일기 (16)아버님 생각

이득수 승인 2020.05.07 16:06 | 최종 수정 2020.05.07 16:39 의견 0
사진1 2011 마을이 수용되어 헐릴 때 세운 평리부락 망향비(비문은 필자가 작성했습니다.)
2011년 고향마을인 평리부락이 국가에 수용되어 헐릴 때 세운 망향비(비문은 필자가 작성.)

남의 자식 된 자로서 어느 듯 일흔을 맞았다. 성인이 되어 내 아이를 낳아 키우며 늘 고생하시던 부모님의 모습과 목소리가 새삼 그리웠는데 이미 손녀가 넷이나 되는 지금은 오죽하랴? 그러나 지금 물려받은 몸 하나를 잘 건사하지 못 해 산소에 갈 때마다 송구스럽기가 짝이 없지만 산소에 갈 때마다 내 작품과 생애가 순탄하게 마무리될 때까지 조금만 이 못난 자식을 돌봐달라며 절을 하고 돌아오곤 한다.

예순 다섯에 아버님이 돌아가신지 어느 듯 53년, 일흔 다섯에 어머님이 돌아가신지 31년이 된다. 먹고살고 아이를 키우느라 정작 부모님께는 제대로 추모의 정을 보이지 못한 게 늘 송구스럽지만 다행히 우리 아이들이 무난히 잘 자라 그나마 자식 된 체면은 서는 셈으로 자위하고 있다. 

얼마나 더 살아 어버이날 몇 번이나 더 부모님을 회고할지 확신이 없어 이번 어버이날을 맞아 아버님과 어머님을 추억하는 글을 한 편씩 연속 올립니다. 

아버님 생각

'송애'는 붕어의 언양 사투리다.
어릴 때 나는 붕어가 송어고 송애는 붕어의 사투리인 줄 알고 있었다. 나중 알고 보니 진짜 송어는 산천어의 암컷으로 길쭉하게 크고 못 생긴 놈이라 대단히 실망을 했다.
 
여름방학이면 매일이다시피 도랑에서 고기를 잡았다. 하루는 깊은 웅덩이가 없는 냇가마을이라 좀체 잡기 어려운 붕어 손바닥만 한 놈을 잡았다. 어린 마음에 자랑하고 싶어서 논에 찾아가서 아버지께 

“아부지 송애 잡았심더.” 

했더니 

“그래 억수로 크구나” 

하셨다. 집에 와서 아버지의 술안주로 깨끗이 씻어 비늘을 치고 횟감을 만들어 놓았는데 아버지가 늦게 오셔서 고기가 상할까봐 조바심을 내던 일이 눈에 선하다.

겨울철이 오면 아이들은 참새사냥에 열을 올렸다. 사다리를 타고 초가지붕 이엉 틈의 새둥지에 손을 넣어 잡는 방법, 대밭에 가서 플래시로 대나무를 비추고 눈이 부신 참새를 대나무를 흔들어 떨어트려 잡거나 새가 잘 앉는 나뭇가지에 끈끈이를 바르는 방법들인데 우리 집에서는 바지게로 참새를 잡았다. 

마당 가득히 눈이 내려 쌓인 날, 빨래방망이로 바지게를 받치고 방망이에 새끼줄을 묶어서 방안에서 문구멍으로 내다보다 배고픈 참새들이 바지게 밑에 뿌린 사래기를 쪼아 먹을 때 얼른 줄을 당겨 바지게 위의 무거운 돌에 깔려 죽은 참새를 잡는 방법인데 너덧 마리씩 잡아서 쌀을 넣고 고아서 '새꼼밥'을 만들어 아버지와 함께 먹는 맛이란! 

초등학교 6학년 때인 계묘(癸卯)년에 보리 흉년(凶年)이 들었다. 찔레, 감꽃, 송기 같은 먹을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먹어대도 열세 살 소년의 보릿고개는 아득히 멀었고, 정작 보리가 익을 때 시작된 장마는 끝이 없어 미처 거두지 못한 보리이삭이 밭에 선 채 물에 불어 싹이 나고 베어 놓은 보리볏가리가 두엄더미처럼 김을 뿜으며 썩어 갔다.

사진2 아버님이 손수지은 생가터가 수용되어 지금은 언양우체국 집배센터가 되어있었습니다. 
고향마을이 수용되어 아버지가  손수 지은 생가가 헐리고 그 터에 지금은 언양우체국 집배센터가 들어서 있다.

얼마나 양식이 귀했으면 과자도 밀기울을 새알처럼 뭉쳐 거죽만 초콜릿색으로 물들여 팔았고 그 것도 꿀맛이었다. 의령의 농협에 다니던 형님이 봉급날 부쳐준 돈으로 매일 등교 때 아버지 자실 술을 사러 소주 됫병을 가게에 맡기고 하교 때 찾아오곤 했다. 한 번은 골목길 가운데 반짝이는 사금파리가 눈에 부셔 넘어지는 바람에 술병을 깨트려 버렸다. 아깝기도 하고 꾸중들을 겁도 나서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염없이 섰는데 

“괜찮다. 그만 가자, 하루는 술 안 묵어도 산다.”

하시며 나를 데리러 오셨다.   

고2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얼마 후 백일장에서 손목시계를 탔을 때 평생 시계 한 번 못 차본 아버지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첫 월급을 타서 어머니 속바지와 막내누나 머플러, 동생이 먹을 과자를 사들고 와서는 아버지 생각이 나서 울었다. 살아 계셨으면 술이나 실컷 사드릴 텐데, 어릴 때 깨어버린 됫병이 얼마나 원통하던지. 

평리(平里) 선생

잔정이 없는 어머니 대신 자상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이름 모르는 것이 없고, 옛날이야기 잘 해주시던 아버지가 나는 너무 좋았다. 내가 좀 자랐을 때부터는 건강이 안 좋아 오래 고생하시고, 가장 예민하던 사춘기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억은 내게 너무나 애련한 안타까움이다.  

이 세상에 아버지를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나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병적일 정도로 사무치는 아픔이다. 경치 좋은 곳에 놀러가거나 좋은 안주로 술 마실 때 아버지가 생각나면 너무너무 슬프다.

한 해가 이틀밖에 안 남은 세모의 아침, 망년회로 골병든 속을 달래며 출근하다 시장입구 노점상의 송애를 보고 아버지 생각이 너무나 간절해서 나는 아침부터 울어버렸다(수필집 《달팽이와 부츠》(2003)에 수록된 내용 일부 수정.).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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