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리(平里) 선생의 명촌리 일기 (14)토곡 소식 짠짠짠1

이득수 승인 2020.05.04 15:20 | 최종 수정 2020.05.07 16:14 의견 0
오래전에 찍은 할아버지와 네 손녀들
오래 전에 찍은 할아버지와 네 손녀들.

멀리 인도에 간 손녀들이 보고 싶어 〈인도소식 짠짠짠〉을 두 번 올리고 나니 아들과 며느리는 좋아들 하지만 반대로 부산 연산동 토곡에 사는 딸과 사위의 눈치가 보여 한번쯤 외손녀들 이야기를 올려야 될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만혼(晩婚)에 비혼(非婚)이 늘어나 머리가 허옇게 세어도 손주구경을 못하는 사람들이 흔한 판에 함부로 자랑을 하려면 거금의 벌금을 내어야 된다는 시대라 꾸욱 참았습니다. 그러다 마침 어린이날이 닥쳐 아이들 사기진작을 할 겸 눈 딱 감고 연이틀 아들딸네 네 손녀들 두루 소개하려하니 그냥 웃고 넘어가주시기 바랍니다.

제 생애의 첫 손녀인 외손녀 김영서(16)가 태어난다고 제가 서둘러 일을 마치고 산부인과에 갔을 때 아내와 처제를 비롯한 먼저 간 문병객들이 일제히 저를 쳐다봐 흠칫한데 

“형부, 축하해요. 또 붕어빵이 나왔어요.”

둘째 처제의 말에 모두들 와아, 웃는데 아내가 저를 빤히 쳐다보며

“아이고, 저놈의 불량유전자!”

하며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 사연인즉, 

제가 아내와 결혼을 함에 있어 몸매와 성격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이목구비가 반듯한 데 끌렸습니다. 그건 경상도 한 모퉁이에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살아 아직도 몽골리안의 특성인 작고 가는 눈과 낮은 코를 가진 저는 사춘기시절 제 자신이 어느 구석을 보아도 잘 생기지 못 한데 많이 절망했기 때문에 우짜든동 반듯한 아내를 만나 종자개량(?)하려는 꿍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첫딸 슬비(43)를 낳았을 때 조그만 계집아이의 눈과 코가 영락없이 저를 닮아 사람들이 모두들 붕어빵이 나왔다고 깔깔 웃었습니다.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장모님과 처제들은 많이 실망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어느 날 아내 혼자 아이를 업고 언양의 어머니를 뵈러 가는데 버스에서 내려 남천내 다리를 건너 정거장이란 마을에서 생가버든마을에 접어드는데  

“새댁아, 니 득수 마누라제?”

생면부지의 어떤 아줌마가 물어

“아, 예에...”

하는데

“그래. 세상에 씨도둑은 없지. 영락없이 득수 새끼야.”

라고 한 일도 있었습니다. 거기다 두 번째 제 아들 정석(41도) 영판 저를 닮았지만 사내라 크게 괘념치 않았는데 대를 이어 또다시 몽골리안의 얼굴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제 살림밑천 큰 아이는 너무 마음이 여러 잘 울기는 했지만 착하게 잘 자랐습니다. 사춘기가 지나면서 점점 밝아져 대학시절엔 학생회 간부로, 미팅이나 농활에 가면 술 잘 먹는 〈술비〉로 환골탈퇴, 행정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아이엠에프(IMF)로 공무원을 뽑지 않아 회사원이 되고 사내결혼을 해서 그럭저럭 잘 살고 있습니다. 

어렵게 사준 집도 조금씩 키우고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자 왕만두기술을 배워 지하철동래역 옆 대동병원 입구에서 〈명성왕만두〉를 개업했는데 아무 애로사항 없이 정착해 월급쟁이 시절보다 넉넉하게 잘 살고 맛집으로 소문도 나고 단골도 많은 걸 보면 여태 살아오는 과정이 두루 무난해 복이 있는 아이 같습니다.

그 슬비의 첫 아이가 역시나 제 어미와 외할아버지의 판박이로 태어나자 처제 둘이

“요즘시대에는 성형수술을 안 하고 못 배길 거야.”

“아, 그거야 유전자제공자 형부가 책임지고 돈을 내야지.”

하고 중얼거리는 바람에 졸지에 저는 앞으로 태어날 손자들 중 저를 닮은 놈은 모조리 제 부담으로 성형수술을 해주기로 약속했습니다.

딸이 맞벌이라 영서(暎敍, 사이버시대의 총아)라고 이름 지은 그 아이는 22개월 동안 우리 집에서 키우며 주말에 부모들이 보러오는 식이었습니다. 나중에 친정에 가까운 망미주공 아파트로 이사시킨 후 제가 병이 나 아내가 언양에 올 때까지 열네 살이 되도록 키운 제 아내는 두 무릎을 다 수술할 정도로 골병이 들었지만 그래도 〈첫사랑〉이라고 끔찍이 좋아하며 저는 그 아이와 놀며 〈키즈팡팡〉에 들어가 동요를 가르치다 레퍼토리를 한 50개 늘렸습니다.

현서의 시화 〈대게의 여드름〉

건강하게 잘 자랐지만 독서나 공부에 그리 열중하지도 않고 그냥 평범한 아이인데 작년 중3 가을에 작은 반전이 하나 일어났습니다. 교내 백일장에서 우수상을 받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걸 그걸 〈조손시화전〉에 올리게 내용을 보자고 하니 자신이 무얼 썼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상을 탔으니 할아버지 자질은 물려받았다고 우리 사위가 엄청 좋아했지만 가장 예민한 사춘기라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기화로 늦 머리가 트여 제 어미처럼 순탄한 생애를 보내기를 빌어봅니다.

두 번째 외손녀 현서(8세)는 태어날 때 산부인과 영아실에서 가장 코가 오뚝하고 머리가 검은 아이라 외가 이씨 가문에 경사가 났습니다. 두 달 빠른 서울의 친손녀마저 얼굴이 저를 닮아 또 성형수술비가 늘어난 판에 이목구비가 반듯한 아이가 태어났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이름도 현서(炫敍)로 지어 〈불꽃처럼 화려한 인생〉을 살라고 기원했습니다.

그런데 외탁을 했다고 기뻐한 이 아이는 성격이 그간 우리가 길러온 네 아이(아들딸과 영서와 서울의 가화)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다른 아이들보다 말이 늦은 데다 골목시장 수족관의 활어를 구경하다 그만 보고 집에 가자면 땅바닥에 드러눕는 식으로 성격이 좀 특별했습니다. 

정년퇴직한 제가 매일 유모차로 공원에 데리고 가 걸음마를 가르치면 보는 사람마다 모두들 예쁘다고 난리인데 일체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처음 어린이집에 가는 날 아이도 안 가겠다고 울었지만 가족들은 잘 적응해낼지 엄청 걱정을 했습니다. 

다행히 두 달 뒤에 그 애는 무난히 적응해 친구를 사귀기 시작했고 성격이 밝아지면서 잘 웃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거기다 금상첨화로 좀 늦게 배운 말이 유아원 선생님 말투를 그대로 닮아 표준어에 경어를 구사하고 목소리도 예뻐 일약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잘 따르고요.

그런데 지지난 해 추석날이었습니다. 가족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점심을 먹고 제가 문득

“가화, 현서가 벌써 일곱 살인데 한 13년이 지나 아이들이 스무 살 대학생이 되면 나는 어떻게 될까?”

하는 이야기에 모두들 병든 저를 보며 눈치만 살피는데 현서라는 놈이 느닷없이

“죽.어.요.”

또박또박 결론을 내고 말았습니다. 안 그래도 당시 컨디션이 안 좋아 전 가족이 제 눈치만 보던 때라 방안의 가족, 심지어 놀러온 두 누님들까지 초주검이 되어 저의 눈치를 살피는데 

“안 돼.”

울상이 된 그 애가 갑자기 제 입을 틀어막아 아무도 입을 열지 못 하고 한 동안 묵언(默言)수행을 하다

“그럼. 그렇겠지. 어쩜 그렇게 철학적 정답을 찾았지?”

하고 제가 수습했습니다.

평리(平里) 선생

지난 설에 서울의 손녀둘이 내려와 〈조손시화전〉에 올릴 시와 동시를 쓰느라 정신이 없자 한글 깨침이 늦어 지난번에는 시 대신 그림을 올린 현서가 자기도 뭔가 시를 쓴다는 게 맞춤법이 엉망이어 제 어미가 고쳐주다 갑자기

“아빠!”

하고 놀란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글을 늦게 깨친 그 애의 마음속에 놀랍도록 투명한 시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래와 같은 내용의 시를 〈조손시화전〉에 올리는 것은 물론 방학숙제로 내었더니 토현초등학교가 발칵 뒤집힐 정도로 선생님들의 귀염을 받았답니다. 네 명의 손녀 중 저의 시적 감성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아이, 우리 똥강아지가 이제 귀여운 토끼 새끼가 된 것입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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