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리(平里) 선생의 명촌리 일기 (17)어머니의 신(神)

이득수 승인 2020.05.09 00:10 | 최종 수정 2020.05.09 00:32 의견 0
진장이라는 야산의 공동묘지에 있는 조그맣고 평범한 어머님산소. 
진장이라는 야산의 공동묘지에 있는 조그맣고 평범한 어머님 산소. 

 6.25 동란 중에 배태한 내가 태어났을 때 7남매나 되는 자식을 거느린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해 어머니는 농사일은 물론 언양장의 노점에 진장과수원의 복숭아나 사과를 받아 수십 리 되는 산길(그것도 빨갱이가 우글거리는) 배내골까지 행상을 다니는 바람에 열다섯 살이 많은 둘째 누님이 나를 업어 키웠다. 그래서 나는 다 커서 객지에 나갈 때까지 우리 어머니가 오로지 장남인 형님만 좋아하고 나는 전연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다.

주로 아버지와 누나들 틈에서 세상을 배우며 자란 나는 성인이 되어 객지생활을 하면서 어렴풋이 어머니는 나도 역시 사랑하고 걱정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다 제2하사관학교에서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고 휴가를 왔을 때였다. 타고난 천재로 공부는 적수가 없어 당시 전국 유일의 국립체신고등학교를 다닌 형님은 몸이 약한 데다 마음이 소심하고 결벽증이 있어 조울증을 앓아 중퇴를 하고 언양농업학교에 편입, 당시 국책사업으로 출범한 농협의 창립요원이 되어 군복무 중에 결혼을 하고 의령농협에 다녔다.

업무처리가 꼼꼼하고 글씨가 예쁘다고 요직인 대부계에 발령이 났는데 그 자리가 농자금을 융자해주고 커미션을 받아 농협지점장을 먹여 살리는 자리인데 그 커미션을 받지 못해 돌연 퇴직을 하고 집에 돌아 와버린 후였다. 체질에 맞지 않는 농사를 짓느라고 가정형편과 분위기가 엉망이 되 있어 휴가 온 내가 농사일을 거들고 귀대할 때 교통비 줄 형편도 되지 못했다.

이제 늙어 장사도 못하는 어머니는 아무 도움도 못줘 미안하다고 귀대하는 나를 보고 훌쩍였는데 부대에 거의 도착해 가방이 좀 무겁다 싶어 손을 넣어보니 어머니가 평소에 모은 동전을 백 개도 넘게 넣어놓은 것이었다. 알고 보니 어머니는 어느 자식 못지않게 나를 사랑하고 계셨던 것이었다.

제대를 하고 결혼을 하고 여전히 가난했지만 마음이 착한 아내가 우리 어머니가 오시면 지극정성으로 모셔서 그나마 자식도리를 하고 객지 영주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골샌님 형님은 문상객이 거의 없고 대신 수백 명의 구청직원과 지역유지들이 문상을 와 장지 진장만디가 그득해 버든마을이 생긴 이후 가장 성대하게 둘째가 장례를 다 치렀다고 소문이 나 외삼촌이 너무 흐뭇해 하셨지만 내겐 아무 감흥이 없었다.
 
사실 어머니에게는 특별한 잔정도 못 느끼고 크게 효도도 못 했는데 나이 마흔이 넘어 교통사고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수술대에 누웠을 때 어머니가 얼마나 생각이 나던지...

50대에 직장생활이 너무 힘들 때 비로소 크나큰 언덕인 어머니, 말은 없어도 누구 못잖은 깊은 사랑을 그리워하며 가끔 눈물을 짓기도 했다. 그 어머니가 가신지 벌써 31년, 살아서 한 번도 살갑게 모시지 못한 불효를 속죄하며 글 한 편을 올린다.

마을공동 빨래터 '앞세메'가 고속도로 박스 아래 통행로로 변해 종일 교통체증을 일으켜 빨래하던 어머니를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神 

대보름이나 영등(靈登, 음력 2월 초하루)날이면 어머님은 아침상을 차려놓고 소지(燒紙)를 올렸다. 모처럼 오곡밥과 나물무침, 생선찌개가 푸짐한 밥상을 대한 내 뱃속에서는 커다란 걸귀(乞鬼)나 장대회충이 요동을 치는지 금방 꼬르륵 소리가 나면서 침이 꼴깍꼴깍 넘어왔다. 어머님이 아버님부터 시작해서 아들, 딸, 사위, 손자, 손녀순서로 차례로 문종이 한 장씩을 촛불로 점화 그 뜨거운 불꽃을 손바닥에서 살라 올리면서 축원을 드리는 동안 나는 너무 배가 고파 머릿속이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나는 어느 듯 주일학교학생이 되어 있었다. 스스로 하느님을 믿겠다는 생각보다는 순전히 먼저 기독교를 믿기 시작한 어머님 때문이었다. 어머님은 몇 년째 기관지천식으로 고생하며 겨울이면 기동을 못 하는 아버님, 신경쇠약을 앓는 둘째 누님과 형님이 교회만 나가면 씻은 듯이 낫는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나는 금방 찬송가에 익숙해지고 구약성경의 재미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러면서 도무지 기독교용어에 적응이 안 되어 목사가 심방을 와도 할렐루야, 아멘 외에는 찬송가 한 구절도 부르지 못하고 크리스마스를 '히루꾸마스'라고 발음하는 어머니가 너무나 딱하고 부끄러웠다.

자신의 병이 낫기를 빌러 교회에 나가는 어머님을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은 엉뚱하게도 아버님이었다. 한 평생 유교문화에 젖어온 농사꾼으로서 농악상쇠며 상두꾼, 선소리꾼인 아버님이 기독교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그러나 정작 임종을 앞둔 어느 눈 오는 겨울날 평생의 가난과 배고픔을 보상받으려는 마음이었던지 하늘나라에는 '만나'라는 양식거리가 눈 오 듯 내린다는 목사의 이야기에 하느님의 아들이 되기를 결심, 눈물 흘리며 회개하여 신자가 되었고 임종후 기독교식의 장례를 치렀다.

내가 객지생활을 하던 20대 초반에 고향집에 가면 어머니는 아침마다 샘물을 떠놓고 해 뜨는 동쪽 담벼락을 향해 수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손을 비는 미신쟁이 촌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그 때는 며느리, 사위, 손자 숫자도 엄청나게 불어나서 차례로 축원하는데 한 시간 이상이나 걸렸는데 추운 날씨에 나이든 노인네가 안쓰러워 

“어무이, 말라꼬 그랍니까? 경주댁 담구멍에는 배미(뱀)새끼밖에 없으니 그마 치아뿌이소.”

하고 자식들이 여러 번 말린 후에야 그만 두게 되었다.

그 어머니에게 특별한 신앙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건 특별한 아들 사랑과 세 아들에게 고기(생선)을 실컷 먹이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내가 시집을 와 시어머니와 단둘이 첫날밤을 자는 날 불을 끄기 직전에

“야야, 며늘아!”

정색을 하고 말문을 열어 거창한 내훈(內訓)이라도 주실 줄 알았는데

“여러 말 할 것 없이 니 서방은 괴기라면 조또 빤다. 괴기나 많이 사다 믹이라.”

한마디를 하고 잠을 청했다고 했다. 엉뚱하고 혼란스럽지만 아무 말 못하고 자고난 아내가 부엌에 나가자 먼저 나온 형수가 

“동서야, 혹시 어무이가 무슨 말씀 안 하시더나?”

“예에...”

하고 머뭇거리는데

“니 서방은 괴기라면 하고 말이다.”

“아, 예.”

하고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10년이 지나 막내아우가 장가를 갔는데 제수씨가 첫날밤을 보내고 부엌으로 나오자 형수가

“동서야, 혹시 어무이가 무슨 말씀 안 하시더나?”

하고 물었는데 놀랍게도 두 명의 며느리에게 했던 이야기를 그날도 했다는 것이었다. 20년의 세월이 넘게 세 명이 며느리들에게 똑 같은 당부를 하신 우리 어머니, 아들에 대한 집착을 넘어 참으로 대단한 신념이라 할 것이다.

평리(平里) 선생

형님이 교편생활을 하던 객지 영주(榮州 )에서 돌아가시기 전 몇 해 동안 어머니는 지성으로 절에 다니셨다. 그 종잡을 수 없는 종교적 변신이 기막히기는 하지만, 무슨 죄 있으랴, 그저 가족에게 좋고 자식에게 좋다면, 믿고 빌고 그러다 당신 마음 편하면 그 뿐인 것을. 딱한 것은 불교용어를 '관셈보살'밖에 모르시는 거다. 하다 못 해 문수보살, 지장보살이라도 좀 아셨다면.....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 형제는 어떤 식의 장례를 치를까 많은 갈등을 겪었다. 이미 교회권사가 된 둘째 누님이 기독교식을 고집했지만 다니던 절에서 스님이 내려와 유교식 장례에 염불을 가미해 고향뒷산에 모시고 가까운 절에 49제를 봉안했다. 장례 때나 제(祭)때나 둘째 누님은 꼭 따로 예배를 보고 찬송가를 불렀다. 마지막 제날 우리 형제는 절 마당의 작은 석탑을 돌며 우리의 상복과 어머님의 혼백(魂魄)을 태우며 옛날의 소지보다 더 붉게 타오르던 불꽃이 사그라지는 것을 보고 나서 거미새끼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저승이 있다면 지금 어머님은 어디 가 계실까. 천당일까, 극락일까, 무릉도원일까. 평생 자식과 농사밖에 모르는 천심(天心)으로 살았으니 아마도 무척 아름답고 편안한 곳에 계시리라 믿어본다. (2003 수필집 《달팽이와 부츠》에 수록된 내용을 일부 보완하였음)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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