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리(平里) 선생의 명촌리 일기 (11)이름이 억울한 꽃 '솜방망이'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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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4 16:39 | 최종 수정 2020.04.24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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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에 나오는 황금빛 꽃송이가 바로 '솜방망이꽃'입니다. 저 스산한 묵정밭에 어쩌면 저렇게 눈부시게 황홀한 꽃이 피었는지 반짝임으로만 치면 가장 흥성한 왕조 로마나 당(唐)의 금화(金貨)보다 찬란하고 사람을 들뜨게 하는 관능(官能)미로만 치면 천경자의 <보리밭>이나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넘어 구스타프 클림트의 <귀부인>이나 <키스>보다 더 울렁임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왜 저 아름다운 꽃의 이름이 뭔가 못 마땅하게 빈정거리는 '솜방망이'꽃이 되었을까요? 본래 방망이의 용도는 빨래방망이, 다듬질방망이 등 여인네의 동반자이자 생활도구였는데 그게 사내들이 사용하기 시작하며 그만 범인을 추포하고 닦달하는 박달나무 '육모방망이'로 형구(刑具)가 되면서 뭔가 불편하고 버성긴 존재가 되더니 후세엔 야구배트가 되면서 운동기구, 놀이기구가 변하면서 공격성, 폭력성 심지어 사내를 지칭하는 외설(猥褻)의 상징으로 변질되기에 이르렀지요.
솜방망이는 죄 지은 자를 가차 없이 처벌하는 추상(秋霜)같은 육모방망이가 온갖 부정부패가 만연하던 가장 위선적이고 비효율적인 주자학의 나라 조선왕조에 와서 권력자의 자제나 돈 많은 범죄자에게는 마치 솜방망이처럼 물러빠지면서 유래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멋쩍은 단어를 하필이면 저 눈부신 야생화가 뒤집어쓴 것일까요.
우선 솜방망이꽃을 옆에서 보면 요즘은 다듬이질보다는 칼국수나 미는 그런 방망이와 많이 닮았음을 느낄 수 있고 어찌 보면 월드컵축구 줄리메컵 같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그래서 저 아름답기만 한 꽃이 그 이름을 뒤집어쓴 건 아무래도 좀 못 마땅합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곰곰 생각하면 솜방망이가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요즘처럼 살아가기가 너무 팍팍한 세월엔 아무리 노력해도 취업이 안 되는 젊은이나 일용노무자, 알바세대들에겐 그 기막힌 현실을 떠나 잠시나마 숨을 돌리며 위로 받는 솜방망이라도 좀 있었으면 말입니다. 택배기사가 냉동탑차를 잠시 세우고 배달을 하는 사이에 주차위반 스티커를 끊는다든지 과일 몇 상자, 채소 한줌을 펼쳐놓고 행인들의 눈길만 기다리는 노점상단속에는 때에 따라 솜방망이처벌이 많이 아쉽기도 한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구조하던 탤런트 김혜자 씨가
“저 아이들은 비록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만 근 10년을 뛰어도 여전히 구직자인 청년이나 비정규직 근로자에겐
“누가 내게 그런 솜방망이라도 좀 휘둘러 줘. 제발 날 계속 가만 두지 마!”
하며 절규(절규)라도 하고 싶을 겁니다. 그렇게 힘든 사람에게 이 시대는 솜방망이의 조그만 위로나 반전(反轉)마저도 준비하지 못 했으니 말입니다.
코로나19로 모두 위축된 요즘 누구든 저 화려한 솜방망이꽃을 보며 한번 숨을 돌렸으면 싶고 또 제 포토 에세이를 열심히 읽어주는 귀부인들의 단톡방 <미인천하>에서 벌써부터 명촌별서를 방문해 바들뜰과 골안못을 같이 걷고 싶어 하는데 이놈의 코로나가 어찌나 질긴지, 제발 저 솜방망이꽃이 시들기 전에 코로나가 끝나 가까운 이들과 칼치못 못둑아래 딱 다섯 송이만 핀 저 솜방망이꽃을 보러 가야할 텐데 말입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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