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52 봄날은 간다 - 보리누름에 호불늘개이가
이득수
승인
2021.05.19 16:36 | 최종 수정 2021.05.28 10:04
의견
0
저 사진 속의 보리처럼 누렇게 익은 황금 빛다발 천경자의 <보리밭>이나 노란색에 집착하던 밀레나 반 고흐의 보리밭 그림이 생각나시나요?
저렇게 누렇게 보리가 익으면 집집이 보리타작을 하고 감자를 캐서 굶어죽는 위기는 일단 끝이 납니다. 그래서 봇물을 관리하는 보깡구와 마을이장에게도 집집이 보리를 몇 되씩 추렴해서 삿가라고 부르는 수당을 주기도 하고요.
그러나 이내 또 한 번의 위기가 닥치는데 바로 5월 하순 쯤의 느닷없는 추위로 <보리누름에 호불늘개이(과수댁)이 얼어죽는다>는 속담이 다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리가 누렇게 익을 때면 읍내나 마을을 배회하던 문둥이들이 보리밭에서 아이를 잡아먹는다는 무서운 이야기와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나이 들어 그런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저 먼 전라도의 가도 가도 붉은 땅 소록도를 찾아가며 다음 생에 파랑새로 태어나고 싶다고 절규하던 한센씨병을 앓은 한하운(韓何雲) 시인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기억하고 있던 문둥이에 관한 시의 주인공은 알고 보니 미당 서정주였습니다. <문둥이>라는 시를 띄웁니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