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62 나뭇잎이 푸르던 날에 - 새 식구가 생겼어요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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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3 15:45 | 최종 수정 2021.06.0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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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이 제 생일이라 연산동의 딸네 식구가 쇠고기와 홍게, 케이크를 사와 상을 차리는데 구포의 장모님이 약밥 한 상자를 만들어 처남네 식구를 동반하고 오셔서 졸지에 10명의 대가족이 <해피 버스데이>를 불렀습니다.
잘 차린 상이지만 전처럼 술을 못 마시니 영 신명이 나지 않는 데다 치아도 좋지 못해 한 두 점씩 맛만 보고 물러나 여덟 살 외손녀와 울타리의 산딸기와 보리수, 오디를 따기로 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허수아비를 만들자고 의기가 투합했습니다.
각목을 십자가처럼 잘라 붙이고 짚으로 얼굴을 만들고 부직포를 씌워 밭둑에 세우니 그럴 듯했습니다. 옥수수 열매를 제일 좋아하는 가지, 참깨씨를 파먹는 멧비둘기, 제일 잘 익은 토마토만 구멍을 내는 직박구리가 한 번쯤은 놀라겠지만 이내 정체를 간파하고 말 것입니다.
졸지에 목가(牧歌)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것 같은데 손녀가 할아버지 허수아비 말고 자신의 허수아비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각목을 자르고 부직포를 씌워 조그만 허수아비하나를 만들어 옆에 세우니 귀엽고 앙증맞은 모습에 금방 분위기가 동화(童話)적인 풍경으로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마초와 할배, 할매, 3식구가 사는 집이 이제 다섯 식구의 대가족이 되었습니다. 언제든지 놀러 와서 구경하세요.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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