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59 나뭇잎이 푸르른 날에 - 반가워라 산나리꽃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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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2 17:34 | 최종 수정 2021.06.07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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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눈부신 꽃 한 떨기를 올립니다. 국민가수 박재란의 행복의 샘터라는 노래 <심심산골 외로이 피어있는 꽃인가>로 시작되는 가사처럼 봄이 이울고 장마가 오기 전에 호젓한 산골마다 살그머니 피어나는 산나리꽃입니다.
백합이라고 불리는 미국산 나리가 크고 희고 순결한 이미지임에 비해 우리나라 토종 산나리꽃은 키는 작지만 주황색 바탕에 작은 타원형의 수술 몇 개가 가히 어지러울 정도로 참으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가히 매혹을 넘어 고혹이라 할 것입니다.
(2017 연제문학에 발표된 제 단편소설 「산나리꽃」에 바로 그렇게 아름다운 장애인소녀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게 순수 픽션이 아니라는 점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비교적 낮은 지대 골안못 옆 밝얼산 기슭에 핀 저 꽃보다 좀 더 높고 깊고 호젓한 골짜기로 갈수록 점점 꽃송이는 작아지지만 더 한층 눈에 띠는 눈부심의 빛다발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제가 본 산나리꽃 중에 제일 아름답고 고혹적인 것은 길천리 골안못 위 등산로를 따라 등억리 안간월로 넘어가는 해발 500미터 가까운 <말무재> 고개에 딱 한포기 섬뜩할 만큼 고혹적이면서도 안타깝도록 가녀린 산나리꽃을 본 일입니다. 그 때 미처 사진 찍을 생각을 못 했는데 건강이 회복되면 내년 여름쯤에 꼭 한번 찾아갈 작정입니다. <행복의 샘터> 가사 1절을 올립니다.
심심산골 외로이 피어있는 꽃인가
소박한 너의 모습 내 가슴을 태웠네.
그리움의 날개 돋쳐 산 넘고 물 건너
꿈을 따라 사랑 찾아 나 여기 왔노라.
이제 초여름이 되어 골안못을 지날 때마다 그 꽃이 피었던 무덤가를 흘낏 거리는데 오늘 뜻밖에 단 두 송이가 핀 아주 작은 산나리꽃 한 포기를 발견했습니다. 무심코 사진을 찍다보니 하얀 피부, 붉은 입술에 긴 속눈썹의 앳된 소녀가 이제 막 세수를 하고난 얼굴처럼 너무나 깜찍하게 예뻤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작년에 흐벅지게 핀 산나리 꽃을 누가 뽑아갔는지 흔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 화려한 산 나리꽃을 이제 더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거기다 지금 핀 작은 꽃은 무덤 바로 옆이라 여름철 벌초를 한 때 반드시 베어질 텐데 과연 내년까지 살아남아 다시 꽃을 피울지 아니면 이 골짝에서 그 고운 자태가 영영 사라질 것인지 걱정인 것입니다.
저 여린 꽃이 살아남아 언젠가 이 무덤가에 다시 그 화사하고 눈부신 산 나리꽃이 피어나기를, 또 그걸 제가 볼 수 있기를 고대하기로 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지난해 핀 산나리꽃입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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