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71 나뭇잎이 푸르른 날에 - 지상의 별 도라지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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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0 13:05 | 최종 수정 2021.06.14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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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별 풍선> 몇 개를 보낸다는 이야기를 가끔 보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그 모양은 저 도라지꽃 봉오리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언양에서는 돌개꽃이라고 부르는 초록 풀잎 사이에 홀연히 피어난 저 꽃송이는 우주에서 온 무슨 신호이거나 원더우먼의 이마에 붙였던 마크가 떨어진 것 같기도 합니다. 아름답기도 하지만 봉긋하면서도 산뜻하고 청초한 느낌, 그리고 다섯 장 꽃잎의 조화도 무척 뛰어납니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골에 백도라지>
<도라지 캐러 가세 헤이 맘보.>
<도라지 꽃 피는 산골 맹세를 걸고 떠났지>
등 민요, 전통가요, 배호의 유행가에 까지 등장하며 우리 민족과 가장 친숙한 꽃임을 보여줍니다. 이 도라지꽃에 관한 조금은 불편하지만 꽤 재미있는 이야기 둘을 올립니다.
1. 자연산 도라지를 삶아 물에 불려 껍질을 벗긴 울퉁불퉁한 도라지를 세로로 쭈욱 찢어 만든 도라지나물은 고사리, 콩나물, 미역줄기, 포랑나물(추석전의 김장배추나 무를 솎은 나물)과 함께 명절제사의 기본 재료였는데 특히 비빔밥의 맛을 내는데 제격이지요. 지금 기내식으로 나오는 비빔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오묘한 맛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명절날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다 나이어린 딸이나 며느리 또는 손녀가 한꺼번에 도라지를 두 개 집으면 할머니가 젓가락으로 탁 치면서
“니는 가시나가 무슨 돌개나물을 한몫에 두개를 묵노?”
하고 야단을 쳤답니다. 그만큼 귀하다는 이야기지요.
2. 6년산 인삼처럼 굵고 통통하며 두 갈래로 갈라진 도라지를 벗긴 모습을 보고 옛사람들, 특히 문밖출입이 힘든 아낙네들은 묘한 상상을 했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민요에는 도라지 자체나 도라지를 캐거나 그걸 바구니에 담는 행위 전체를 매우 에로틱한 암시로 느끼는 경우가 많았는데 특히 동냥아치나 걸립패가 부잣집(특히 인심이 사납고 인색한 집)의 담을 빙빙 돌며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골에 백도라지 한두 뿌리만 캐어도 대바구니 철철 다 넘는다.>
꽤 걸쩍지근한 노래를 이어가다 정 안 되면
<천안삼거리 흥 능수나 버들이 흥 척 늘어졌구나 흥>
자꾸만 축축한 노랫가락을 늘어놓으면 부잣집 마님이 다 큰 딸들이 들을까 봐
“예, 언년아. 빨리 보리쌀 두어 됫박 주어서 보내지 않고 뭐 하고 있니?”
이렇게 종말이 나곤했답니다. ㅎㅎㅎ.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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