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73 나뭇잎이 푸르던 날에 - 후투티, 절반만 이룬 꿈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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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5 10:30 | 최종 수정 2021.06.15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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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올린 푸르른 하늘에 흰구름이 두둥실 떠도는 싱그러운 초하(初夏)의 화폭을 왜 저런 삐죽한 전봇대 하나로 가로지른 지 궁금할 겁니다. 그러나 화면을 확대시켜 전봇대 윗부분을 자세히 보세요. 예사롭지 않은 새 한 마리의 실루엣이 똑똑히 보일 것입니다. 바로 우리나라의 여름철새 중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후투티, 머리의 화관이 아름다워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수컷의 모습입니다.
4년 전 제가 명촌리에 온지 얼마 안 되는 초여름의 오후에 고추밭에 낯선 새 한마리가 기어가는데 뜻밖에도 갈색과 연두 빛의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후투티였습니다. 우투티란 철새는 보리밭을 갈아엎어 모심기를 할 무렵 논밭이나 두렁에 서식하는 논두럼아재비(땅강아지)를 주식으로 새끼를 키워내는 매우 귀한 새라 제가 그걸 보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 후로도 가끔 암컷이 밭이랑에 나타나 휴대폰을 찾아 사진만 찍으려 하면 금방 낌새를 느끼고 날아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주말에 찾아온 아내에게 먼저 후투티란 신비한 새를 설명하고 다음 내가 그 새를 보았다고 이야기하니
“영감, 혼자 지내다가 헛것을 보셨구먼.”
믿지를 않았지만 다음에는 매우 진지하게 이야기하자
“아예 소설을 쓰는구먼.”
또 양치기 소년이 되었습니다.
그 후 마초를 데리고 산책을 나서 <명촌농장>이라는 폐양계장을 지나는데 지금은 옛날 주인이 가끔 와서 솥에 무언가 삶아먹고 소주병을 산더미처럼 남기고 사라지는 폐가의 마당에서 또 후투티를 발견했는데 이번에는 수컷도 있었고 황급히 날아가 숨는 곳이 바로 마당가의 밤나무였습니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거기에 둥지를 튼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근접촬영을 못해 멀리서 찍은 검은 윤곽은 그게 참샌지 딱샌지도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 후 저는 언젠가 제 손으로 후투티 수컷의 화려한 사진을 찍고야 말겠다고 했지만 가끔 암컷이 나타나기는 해도 여전히 촬영은 못 했는데 오늘 칼치 못 가는 모퉁이 전봇대에서 마침내 가장 확실한 사진을 찍은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실루엣만 찍어 절반의 성공입니다. 거기다 더 놀라운 것은 올해는 우리 마당에서 한 50, 60미터 떨어진 뒷산에 둥지를 튼 모양으로 잔디밭에 누웠으면 예사로 암컷이 우리 밭을 날아다닙니다. 어쩌면 암컷이 알을 품고 먹이를 잡아오는 모든 일을 다 하는 것 같고 잘 나타나지 않은 수컷은 그저 옷만 화려하게 입은 날건달인 것 같기도 합니다.
명촌리에 살면서 제가 가장 존경하는 직업이 새들을 촬영하는 사진작가입니다. 멀어서 못 찍고 곁을 안 주어서 못 찍는 그 예민한 놈들의 짝짓기와 부화를 찍는 것은 참으로 오랜 잠복과 인내의 시간, 그 위에 행운이 겹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명촌리에 들어와 뜻밖에 맞닥뜨린 세 개의 행운인 화려한 후투티와 황금빛의 길고 유연한 동체를 가진 아름다운 맹수 담비, 곡예비행으로 까마귀나 산새를 유혹해 잡아먹는 가장 작고 날렵한 매 새호리기의 먹이활동을 찍어볼 꿈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비록 절반의 성공이지만 그 첫 걸음을 디딘 것입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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