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76 나뭇잎이 푸르른 날에 - 키 작은 해바라기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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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9 09:45 | 최종 수정 2021.06.2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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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처음으로 구해다 심은 키 작은 해바라기가 꽃이 피었습니다. 처음 귀촌하던 해, 울타리를 따라 키 큰 해바라기를 심었는데 태풍이 올 때마다 쓰러져 붙잡아매느라 고생 끝에 수사자 대가리만큼 넓은 화판에서 한 홉도 넘는 씨앗이 쏟아져 몇 되나 되는 해바라기 씨앗을 창고에 보관하다 쥐에게 몽땅 털린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해바라기(向日花)라고 하면 보통 종일 태양을 향해 발돋움을 하는 그리움의 존재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길러보면 너무 크고 억세 다소곳이 기다리는 가녀린 여인상이라기보다는 태양이건 임이건 나타나기만 하면 단번에 낚아챌 것만 같은 적극적이고도 강렬한 여걸의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 키 작은 해바라기가 몇 송이 피어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옛날 잘 먹지도 못 하면서 일곱이나 아홉쯤 자식을 낳아 키우며 평생을 남편이나 자식들을 걱정하거나 기다리던 키 작은 조선의 여인들처럼 작고 단단하고 오래 묵은 그리움의 이미지가 풍깁니다.
작은 여인이 아름답다는 묘할 묘(妙)자처럼 해바라기 역시 작아야 기다림과 그리움이 간절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역사상 가장 우울한 화가로 꼽히는 반 고흐의 대표작 <해바라기>도 화병 하나에 무려 15송이가 꽂힌 것으로 보아 역시 키 작은 해바라기인 것 같습니다.
꽃은 물론 그리움마저도 역시 <키 작은 그리움>이 더 간절한 것 같습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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