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74 나뭇잎이 푸르른 날에 - 사걀의 마을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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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5 11:11 | 최종 수정 2021.06.18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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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무릉도원이나 파라다이스는 아니더라도 오붓하게 살고 싶은 마을을 꿈꾸라면 여러분은 어떤 모습이 떠오르는가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저는 햇볕이 따뜻한 언덕이나 골짜기에 몇 개의 뾰족지붕 사이로 빨간 꽃이 피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포근한 마을입니다.
이미 전국토가 도시화되어버려 현실적으로는 어렵겠지만 굳이 그림을 예를 들자면 천진난만한 어린이와 게(蟹)와 물고기가 어울린 이중섭의 그림이나 동화처럼 따뜻하고 비눗방울처럼 붕붕 뜨는 분위기에 아이 가진 여인들이 자주 등장하는 마르크 샤갈의 그림을 들 수가 있겠습니다.
처음 언양 명촌리 골티라는 골짜기의 대밭을 베어내고 몇 채의 뾰족한 빨간 지붕이 들어서자 아랫마을 사람들이 <펜션마을>이라고 부를 때 저는 <샤갈의 마을>이라는 동화적인 이름을 찾아내었습니다.
세계적인 무대설치가로 늘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그의 그림 중에서 저는 아이들과 아이 가진 여인의 나신이 등장하는 그림을 제일 좋아합니다. 또 황소를 주로 그리는 이중섭의 그림 중에서도 물고기나 게와 함께 나오는 아이그림을 제일 좋아하는데 그건 저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늙은이들이 공통점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그리던 '샤갈의 마을'에 걸맞게 저와 함께 이사 온 2집의 젊은 부부에게서 과연 7, 8, 9세의 세 소녀가 있어 울타리에 줄장미가 피기 시작한 이듬해부터 골짜기 가득히 세발자전거를 타는 계집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퍼져나가 꿈속의 마을이 눈앞에 다가온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꿈과 달라 건축과 사용허가에 따른 관계공무원과 건축업자, 기술자들의 끝없는 책임회피와 속임수 또 마을사람들의 경계랄까 텃새에 진입로와 수도, 전기도 인터넷도 난관에 봉착하고 폭우로 침수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새로 지은 윗마을 때문이라고 몰려오기도 했습니다. 옆집의 젊은이들은 모두 일을 나가 혼자 시달리던 저는 마침내 골병이 들다 못해 몇 달 전의 건장진단에서 멀쩡하던 간에 급성으로 암이 생겨 터지는 벼락을 맞기도 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함부로 낙원을 꿈꾼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늙은이가 동심(童心)을 꿈꾼다는 일이 마치 <독이 든 성배(聖杯)>처럼 위험한 것임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이 조그만 골티마을은 그 귀한 초등학생이 셋이나 있는 희망의 마을이며 초록색 펜스에 걸어놓은 시화나 텃밭의 허수아비를 보고 집배원이나 택배기사가 너무나 좋아하는 모습에서 절반의 성공을 거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집집이 장미와 모란, 국화와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새들이 둥지를 틀고...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벌써 4년의 세월이 흘러 세 명의 아이들이 곧 중학생이 되고 사춘기가 오는데 더 이상 이사 오는 집도 아이도 없이 이제 아무도 타지 않는 세발자전거가 잡초덩굴에 나뒹구는 것입니다.
적어도 7, 8채의 뾰족지붕이 있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어지지 않아야 '샤갈의 마을'이 유지될 텐데, 어서 꿈 많고 용기 있는 젊은이들이 새집을 짓고 아이를 낳아 꽃 보듯이 살아가는 동화(童話)를 꿈꾸어 봅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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