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77 나뭇잎이 푸르른 날에 - 내가 버려야 할 것들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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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1 00:14 | 최종 수정 2021.06.23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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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숲속을 떠나는 날 나는 맨 처음 내 이름을 버리고 내 눈빛에 고이던 안타까움을 버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누구를 그리워했다는 그런 기억과 그런 날의 눈 흘김마저 버려야할 것이다.
나와 평생을 함께 한 사람, 하나씩 태어날 때마다 내게 함박꽃이 되어주던 아들딸과 손녀들, 그들과의 다정한 식탁과 따듯한 대화의 기억도 버리고 하나도 명품이 되지 못한 못난 자식 같은 내 시(詩)들과 아직도 완성하지 못한 몇 개의 테마와 시어(詩語)들...
늘 끼던 안경과 손때 묻은 휴대폰과 그 속에 자리잡은 다정한 내 친구와 이웃들의 전화번호, 그들의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웃던 기억과 몹시 싸웠던 날의 화난 눈빛마저도...
그러나 비오는 날에 듣던 폴 모리아의 음악을 차마 버리고 갈 수가 없다. 솔베이지 송의 끄트머리에 폭포처럼 떨어지는 그 아득한 절멸의 음표들 역시.
그리고 어질어질 어지러운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망막에서 지울 수 없고 김소월의 애련한 시 한줌 손바닥에 움켜쥐고 있다. 아내의 눈빛보다 더 감미롭던 된장찌개가 익어가던 냄새, 포근하게 뜰을 감싸던 어둠과 나뭇잎에 고이던 달빛과 밤의 적막을 깨트리며 마초가 짓던 소리와 잠을 설친 아내의 숨소리, 그리고 별처럼 아득한 동그란 얼굴하나...
...모든 걸 다 버려야 한다. 그러나 아직은 아무 것도 버리지 못하고 벌레 먹은 물푸레나무의 이파리처럼 미련의 끝자락에 매달려 있다. 나는 아직 이 숲의 눈빛이 되기에 멀었나 보다, 골짜기를 돌아 나오는 메아리도 능선에 피어오르는 물안개도 저녁하늘을 물들이는 노을이 되기에도. 얼마나 더 세월이 흘러야 내가 바람이 될까? 나는 언제쯤 강물이 될까?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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