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86 나뭇잎이 푸르던 날에 - A자의 질책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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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6 14:05 | 최종 수정 2021.06.30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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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밤늦게 음악을 듣고 들어오다 멀리 데크 위의 빨래 대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가로등 불을 받아 희게 빛나는 커다란 A자 하나가 내 가슴을 강타했기 때문입니다.
아, A자! A자의 굴레!
문득 한 50년 전에 읽은 나다니엘 호오든의 『주홍글씨』에 나오는 신부(神父)를 사랑한 미혼모의 등 뒤에 새겨진 A자 낙인(烙印)이 생각났습니다. 저 역시 술과 그리움을 사랑하다 에칠알콜의 A자 낙인이 찍히고 말았으니까요.
제게 다가온 A자는 Q&A, 질문과 답변(Answer)이나 화두(話頭)의 의미도 아니고 지게나 사다리의 도형도 아닌 무슨 질책(叱責), Ask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여태 무얼 하고 어떻게 살았는가? 어째서 몸 하나도 제대로 건사를 못 하는가? 그러고서 무슨 작품을 쓴다고 난린가? 마치 거대한 질문 Ask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제 마음을 윽박질렀습니다. 한참이나 쉼 호흡을 해 마음을 다잡고, 뭐 그럴 수도 있지, 살다 보면 실수도 하지만 또 좋은 날이 올수도 있지 뭐, 시침을 뚝 때고 데크 위로 올라올 때였습니다.
이크!
이번에는 빨래 대에 걸린 수십 개의 작은 A, 빨래집게들이 일제히 저를 쏘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렸습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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