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78 나뭇잎이 푸르른 날에 - 밤하늘의 폴모리아

이득수 승인 2021.06.21 20:56 | 최종 수정 2021.06.23 08:34 의견 0
명촌별서를 부추는 달(전등 뒤에)

저녁 8시 연속극이 끝나고 9시 뉴스가 시작되어 순둥이 제 아내가 새근거리며 잠이 들면 저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와 가로등불이 길게 스며드는 잔디밭 흔들의자에서 음악을 듣습니다.

건듯 바람이 불면 기분이 상쾌하고 간혹 밤새가 울면 상념이 회상 속으로 침잠합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견뎌온 하루, 그까짓 거 이기면 뭐 하고 지면 뭐 할 것도 아닌 롯데야구의 승패도 잊고 꽃송이와 나뭇가지 위에 걸린 밤하늘의 달을 봅니다.

제가 나이 들어 가장 잘 한 일중의 하나가 클래식음악을 듣기 시작한 일인데 음악에 별 조예가 없지만 그냥 멍하니 빠져들면 오만 생각이 밀려오다 빠져나가면서 마음이 편안하거나 개운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행진곡을 여남은 곡 수록해서 산책길에 들으면 신명도 나지만 허리도 꼿꼿해지고 걸음도 빨라지는 것 같은데 저도 뭘 좀 아는 양 마초도 괜히 귀를 쫑긋하다 그만 두기도 합니다.

밤엔 주로 《세계 행진곡 대전집》을 틀어놓고 혼자 박수를 치고 어깨를 들썩이며 엄청난 치유효과를 기대하다 멋쩍어지면 폴 모리아의 음악을 듣습니다. 그 사람의 국적이 어딘지는 몰라도 이렇게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경음악, 언제 들어도 포근하게 가슴에 젖어드는 연주를 해준 것이 너무나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태양은 가득히>, <피서지에서 생긴 일>, <부베의 연인> 등 가끔 아는 곡도 있지만 대부분 제목도 멜로디도 낯설지만 낯설면 낯선 데로 들어봅니다.

그러다 잔디에 내린 이슬에 발끝이 찹찹해질 때 쯤 덩그러니 떠오르는 달을 봅니다. 문득 최명희의 『혼불』에서 본 흡월정(吸月精)이 떠올라 열심히 쉼 호흡을 해보다 피식 웃습니다. 그게 몸이 부실한 여인이 차고 기우는 리듬이 자신과 같은 달의 정기를 받아 아이를 잉태하려는 것이지 술을 많이 먹고 골병이 든 늙은 사내에게 무슨 효험이 있으랴 싶어서 말입니다.

아무튼 짧은 여름밤의 한 자락을 빌려 동서양의 음악과 문학과 또 현실의 새소리에 젖는 일이 꽤나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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