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82 나뭇잎이 푸르른 날에 - 잡초와의 전쟁

이득수 승인 2021.06.25 21:21 | 최종 수정 2021.06.26 11:56 의견 0
밭 울타리를 에워싼 잡초들

불볕더위와 장마가 며칠씩 반복하다보니 산과 들판, 길과 논밭은 물론 화단과 잔디밭에까지 우후죽순보다 더 무서운 기세로 잡초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병원에 다니느라 한 2주간 집을 비운 우리 집의 화단과 텃밭도 예외가 아니라 토마토나 가지를 따려 해도 하룻밤에 다섯 마디가 뻗어나가 고손자를 본다는 바랭이풀에 덮여 접근하기조차 힘이 듭니다.

아침 일찍 뜨락에 나가 급한 대로 화단의 잡초를 뽑는 아내를 도와 웃자란 정원수를 잘라내는데 마침 토요일이라 길 아래 밭의 지주내외가 나타나 잠깐 고구마 밭에 풀을 뽑더니

“선생님, 제가 졌습니다. 자존심이 좀 상하기는 하지만 잡초에게 깨끗이 항복을 선언합니다.”

골프채로 잡초의 대가리를 날린다고 전에 제가 <낭만골퍼로>로 소개한 50대의 자유로운 영혼이 싹싹하게 백기를 드는데

“여태 기른 고구마가 아깝잖아? 가을에 고구마도 못 먹고...”

제 아내가 몹시 안타까워하자

“고구마가 없으면 안 먹으면 되고 정 먹고 싶으면 사서 먹으면 되고.”

남편이 남의 일처럼 무심하게 말하자

“맞다. 차라리 빌빌대는 채소를 버리고 싱싱한 풀을 키우면 되지.”

낭만골퍼의 아내가 잡초 속에 녹아버린 상추를 뽑아 던지는 사이에 벌써 컨테이너 박스 속에서 두둥둥 낭만골퍼의 기타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집의 사정은 좀 다릅니다. 무엇이든지 철저해야 되고 완벽해야 되는 아내가 마늘을 뽑은 뒤 광복절전후에 김장 무와 배추를 심으려고 비워놓은 이랑의 잡초를 한참이나 뽑아내더니 갑바라고 부르는 천막용 덮개와 검정색 자동차커버와 부직포 같은 온갖 재료를 찾아와 저더러 잡아달라고 하면서 기어이 밭 전체를 덮어씌웠습니다. 이건 밭이 아니라 밥상처럼 반질반질해 떨어진 밥풀도 주워 먹겠다며 지나가던 누님이 혀를 찼지만 아내는 너무나 흔쾌한 표정이었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다 문득 공직에 근무할 때 새로운 시설이 들어설 때 교통이나 환경영양평가를 받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저렇게 밭 전체를 몽땅 덮어씌울 때 어떤 변화가 올 것인지를 검토해본 결과는 아래와 같습니다.

0. 마초할매 : 풀 걱정을 안 해서 너무나 흡족함. 맘 편하게 화단을 돌보며 자주 영감을 챙길 것임.

0. 마초할배 : 자주 밭에 불려나갈 일은 없어져 좋지만 가끔 할매의 지나친 관심과 잔소리에 시달릴 것 같음.

0. 마초 : 흐리고 바람이 부는 날은 물론 해가 져서 시원한 저녁에 아무데고 배를 깔고 누울 수 있는 어부지리가 생김.

0. 밭둑에 선 할배와 손녀 허수아비 : 앞이 탁 트여 좋긴 하지만 너무 밋밋하고 심심해 자주 하품을 할지도 모름.

0. 이웃에 사는 할배의 누님 : 자기 밭에도 갑바로 덮고 싶지만 재료와 힘이 없어 읍내 종묘상에 가서 슬며시 제초제를 한 병 사올 것 같음.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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