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87 나뭇잎이 푸르던 날에 - 늙은 쥐가 독을 뚫어

이득수 승인 2021.06.26 13:56 | 최종 수정 2021.06.30 23:26 의견 0

오래 전원생활을 꿈꾸다 막상 귀촌하게 되면 맨 먼저 포기해야 하는 일이 무공해 채소를 곁들여 삼겹살을 구워먹는 황홀한 꿈입니다. 전원생활이나 농사가 절대로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부터 농사는 사람의 일이 아니고 비나 바람 같은 날씨, 즉 하늘에 달렸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한 것이 짐승과 새와 벌레들의 피해입니다. 우선 밭에 콩이나 옥수수씨를 뿌리면 비둘기나 까치, 직박구리 등이 넌지시 바라보다 사람이 사라짐과 동시에 모조리 파먹어 도무지 씨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옥수수는 붉은 약품을 칠해서 심고 콩은 심자말자 부직포를 덮어야 합니다.

또 새들이 쪼아 먹기에도 너무 작은 참깨나 들깨씨를 심으면 땅속의 개미떼가 기다렸다는 듯이 굴속으로 물고가 역시 싹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들은 살충제를 치고 참깨를 심는데 저 같은 경우에는 차마 그러지 못해 참깨농사를 포기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콩이나 양대의 싹이 돋으면 그 대가리를 똑 떼어먹는 대두충이라는 벌레도 있고 새순이나 잎을 갉아먹는 진딧물과 비루에 배추흰나비의 애벌레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요새 농약방에 가면 달팽이 잡는 약과 두더지퇴치기구를 다 팔기도 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옥수수가 익으면 이번엔 까치떼가 습격해 다 파먹어버리고...

그러나 그 정도는 약과로 한 번 고라니가 울타리를 넘고 들어오면 콩이나 무, 배추, 고구마 순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황성옛터, 폐허가 되는데 그보다 더한 것은 고구마의 씨를 말리고 땅바닥까지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멧돼지의 피해입니다. 그래도 우리 집엔 골키퍼 마초가 짐승피해는 거뜬히 해결해 제 밥값은 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오래된 농부들이 하는 말로 농사는 짐승이 반을 먹고 벌레가 반을 먹고 또 새가 반을 먹는다고 하니 정작 농부자신에게 돌아오는 몫은 겨우 1/8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제일 막기 힘든 것은 그 중에서도 공중을 나는 새가 되겠지요. 그래서 태양과 바람의 변화에 따라 움직이며 빛을 내쏘는 형광허수아비와 거대한 독수리 연(鳶)과 별별 대책이 다 나오는데 여기 논둑을 고르고 한 두어 평 심은 콩밭을 지키기 위해 한 늙은 농부가 눈물겨운 장치를 설치했습니다.

자세히 한번 보십시오. 늙은 쥐가 독을 뚫는다는 속담처럼 겨우 빈 페트병 하나로 만든 작품이 참으로 절묘합니다. 주름진 얼굴에 허리가 굽은 그의 몸속에 어쩌면 발명왕 장영실의 핏줄이 흐르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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