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64 나뭇잎이 푸르른 날에 - 뜻밖의 명화 한 점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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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3 16:28 | 최종 수정 2021.06.05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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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농로(農路)와 수로(水路)가 대부분 시멘트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옛날의 올챙이와 미꾸라지, 피라미, 장구애비, 물장군, 물방개, 송장벌레 같은 수서(水棲)생물이 살 수가 없어 우리 같이 촌사람이 보면 참으로 삭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동물이나 곤충보다는 수십 배로 생명력이 강한 쑥이나 억새 같은 식물은 바람에 날려 온 작은 양의 모래에 간신히 싹을 틔워 자라면서 점점 많은 먼지와 모래를 흡수해 금방 그 차가운 바닥에 오아시스처럼 풀 섶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다 보면 사진 속의 메꽃이나 왕고들빼기, 구절초나 쑥부쟁이처럼 꽃이 예쁜 식물들도 기생을 하고요.
보통 6월 경 보리를 베고 모심기를 할 때 피는 모미싹(메꽃)이 늦여름 장마 중에 하도 곱게 피어 사진을 찍었는데 뜻밖에 명화 한 점이 나왔습니다.
맨 앞쪽에 기어가는 메꽃줄기와 이미 져버린 꽃봉오리 3개, 부용화나 접시꽃 못지않게 선연히도 고운 메꽃 한 송이, 그리고 뒤쪽의 쑥대머리와 논두렁의 잡초와 벼 포기 사이에 꽂아둔 삽자루 하나...
흐린 날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참으로 무던하게 잘 조화되어 편안함과 호젓함과 고요하고 외로운 느낌이 들지만 일단 눈이 시원하기도 합니다.
오늘 밤 비가 개이면서 달이 떠(그걸 갠달霽月이라 하며 길천리에는 갠달마을도 있습니다.) 어차피 외톨이인 저 메꽃과 삽자루가 두런두런 이야기라도 좀 나누면 좋을 것입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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