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54 봄날은 간다 - 삘기속 같은 자식 낳아 키우며
허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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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9 15:00 | 최종 수정 2021.05.26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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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보이는 끝이 하얀 꽃대가 언양 사투리로는 <피기> 혹은 <삐비>라고 부르는 삘기꽃입니다. 사진보다 좀 어릴 때 통통하게 살진 줄기를 찢어 먹으면 꽃이 피기 전 하얀 속살이 폭신폭신 촉감도 좋고 달았지만 무엇보다 섬유질이 많아 배가 부른 느낌이 좋았답니다.그래서 늘 배가 고팠던 옛날사람들은 저 삘기를 무척이나 귀하게 여겼나 봅니다.
1970년대 『현대문학』에서
세상 사내들은 모두
삘기 속 같은 자식 낳아 키우며
꽃 보듯이 꽃 보듯이 살아가네.
라는 시를 본 일이 있습니다. 어디 사내들만 그럴까요? 그 아이를 자기 배 아파 낳은 여인들이나 새들과 산짐승, 나비와 물고기, 심지어 나무와 풀들도 봄이 되면 제각각 짝짓기를 하거나 꽃을 피워 번식을 하는 데는 나남이 없습니다.
사진은 골안못 못둑에 가득 핀 삘기꽃(위)과 잔디씨 들입니다. 그들의 집념만큼 희고 허벅진 꽃, 검고 야무진 열매가 아름답기보다는 당당합니다. 자연이란 터전에서 최소한의 소임을 다 하였으니까요.
오늘따라 산새들의 울음소리도 종합선물세트처럼 풍성하고 요란합니다. 그 중에서 울음소리가 좀 절박한 놈은 아직 짝을 찾지 못한 놈일 테고 낭랑하고 느긋한 템포로 흥이 넘치는 놈은 이미 짝짓기는 물론 포란(抱卵)을 거쳐 방금 새끼가 부화한 놈일지도 모릅니다.
어느 듯 결혼 44년차, 슬하에 아들딸과 손녀들 총 8명의 권속을 거느린 늙은 아비인 저는 지금 인도의 뉴델리에 주재원으로 떠난 아들과 얼마 후 뒤따라갈 며느리와 두 손녀 때문에 가슴 한 곳이 텅 빈 것 같습니다. 시차가 있어 그 애가 일을 마치려면 밤이 꽤 깊겠지만 오늘은 어쩐지 전화가 올 것 같은 느낌이라 잠 안 자고 기다려보기로 할 작정입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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