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공과 ‘추다르크’, 윤석열의 네메시스(Nemesis)

조송원 승인 2019.12.12 23:05 | 최종 수정 2019.12.12 23:10 의견 0
추미애와 그리스 신화의 네메시스, 그리고 강태공. 출처 : 위키피디아

네메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과응보·보복의 여신이다. 절도와 복수를 관장하고, 인간에게 행복과 불행을 분배한다고 한다. 추다르크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 지명자의 별칭이다.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 ‘잔다르크’처럼 직선적이고 강인한 이미지로 인해 추미애+잔다르크=추다르크로 불리게 되었다.

강태공姜太公은 흔히 낚시꾼의 대명사로 쓰인다. 그러나 강태공은 낚시꾼이 아니다. 강태공은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여상, 태공망 등이 대표적이다. 강태공의 본래 성씨는 강 씨이고 이름은 상尙이다. 선조들이 우와 하 시대에 여呂 땅에 봉해졌으므로, 그 봉지를 성으로 하여 여상이라고도 부른다. 태공망太公望은 ‘태공의 희망, 태공이 바라던 이’로 풀 수 있다. 여기서 태공은 한자로도 같지만, 강태공의 태공과는 다른 사람이다. 주 문왕 선대先代의 태공, 혹은 주 문왕의 아버지라고 해석한다.

궁팔십窮八十 달팔십達八十이란 말이 있다. 80년을 공부만하며 곤궁하게 살다, 드디어 지우를 입어 또 80년을 화려하게 산다는 뜻이다. 이 말도 강태공에서 유래됐다.

『사기세가』 권32 「제태공세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여상(강태공)은 곤궁하고 연로(72세)하였던 듯한데, 낚시질로 주 서백(周西伯·문왕)에게 접근하려고 하였다. 서백이 사냥을 나가려고 하다가 점을 쳤는데, 점괘가 나오기를 “잡을 것은 용도 이무기도 아니고, 호랑이도 곰도 아니다. 잡을 것은 패왕의 보필이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주 서백이 사냥을 나갔다가 과연 위수渭水 북쪽에서 여상을 만났는데,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는 크게 기뻐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선대先代의 태공太公 때부터 이르기를 “장차 성인이 주나라에 올 것이며, 주나라는 그로 하여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생이 진정 그분이 아닙니까? 우리 태공께서 선생을 기다린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이리하여 그를 ‘태공망太公望’이라고 부르며 수레에 함께 타고 돌아와서 사(師·군대를 통솔하는 장관 혹은 국사國師)가 되게 하였다. 이렇게 문왕에게 발탁된 강태공은 문왕의 뒤를 이은 주 무왕을 도와 은의 주왕紂王을 징벌하는 데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이렇게 장황하게 강태공을 소개하는 것은 그의 치국책治國策이 현재 대한민국의 시무時務인 검찰개혁에 대한 시사점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한비자』의 「외저설우 상」에 강태공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자. 태공망이 동쪽의 제나라 영토를 받아 제후가 됐다. 제나라 동해안에는 거사가 살고 있었는데, 광율狂矞과 화사華士 두 형제였다. 그들이 의론을 세우고 이르기를,

“우리는 천자의 신하 노릇을 하지 않으며 제후를 따르지도 않는다. 손수 밭을 갈아서 먹고 우물을 파서 마시니, 남에게 구할 것이 없다. 천자의 호령도 없으며 군주의 녹도 먹지 않으니, 벼슬아치를 섬기지 않고 오직 노동만을 섬길 뿐이다.”

태공망은 잉추에 도착하자마자 관리를 시켜 그들을 잡아 죽였다. 주공이 노나라에서 이 소식을 듣고 급히 파발을 띄워 그를 문책하며 말했다.

“그 두 선생은 현자다. 오늘 나라를 받자마자 현자를 죽이니 어찌된 일인가?” 태공망은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

“저들은 천자의 신하 노릇을 거부하니 제가 신하로 삼을 수 없고, 제후를 따르지 않으니 이들을 제가 부릴 수 없으며, 저들은 밭 갈아 먹고 우물 파서 마시며 남에게 구할 것이 없으니, 이들을 상으로 권면할 수도 벌로 금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임금의 호령이 없으니 비록 지혜롭다 해도 저는 그들을 쓸 수 없고, 군주의 녹을 바라지 않으니 비록 어질다 해도 저를 위해 공을 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벼슬을 하지 않으니 다스릴 수 없고, 일을 맡지 않으니 충성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또한 선왕이 신하와 민중을 부리는 방법이란 작록이 아니면 상벌입니다. 이 네 가지로 부릴 수 없다면, 저는 무엇으로 군주 노릇을 하겠습니까?”

까마귀를 길들이는 자는 아래 날개깃을 자른다. 그러면 반드시 먹이를 사람에 의존해야 하니, 어찌 길들여지지 않겠는가? 대저 밝은 군주가 신하를 기르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신하로 하여금 군주의 봉록을 이롭게 여기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윗사람의 호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군주의 봉록이 이롭고 윗사람의 호령에 따르면 어찌 복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기세춘 『노자강의』)

현재의 검찰이 공익의 대표자이며 인권의 수호자이며 법률 전문가인가? 오로지 자기 조직의 이익을 대변하며, 인권은커녕 자기 조직의 부당한 권력만을 추구하는 ‘법 기술자들’일 뿐이다. 일개 법무부 외청의 장으로서 윤석열 검찰총장이 국가를 죄 뒤흔드는 정치적 퍼포먼스를 이대로 두고만 보고 있어야 하는가!

조송원

강태공은 군주의 영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 현인인 은자隱者까지 잡아 죽였다. 그 옳고 그름을 논하기에 앞서 통치의 근본을 세우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독재정권에서, 불의한 정권에서 검찰은 어땠는가? 납작 엎드려 주군의 정치공작에 검찰권을 무한히 제공했다.

민주정권에서는 ‘기개’라는 미명하에 대통령에게 달려든다. 왜? 보복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민주정권의 올바른 법치를 저들은 두고두고 악용해 왔다.

추다르크는 어떻게 할까? ‘보복’은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네메시스. 인과응보. 검찰개혁, 간단하다. 모든 조직의 구성원 다 그렇지만, 승진에 목을 매는 건 검찰이 유별나다. 하여 정당한 주어진 법무부 장관의 권한으로 출척黜陟만 제대로 해도 간단히 해결될 문제다. 과오가 있는 자 쳐내면 되고, 묵묵히 검사 본연의 임무에 매진하는, 공이 있는 자 승진시키면 된다. 그래서 민주정권도 칼날이 시퍼렇다는 것을 검찰 구성원들에게 각인시키면 만사형통이다.

인과응보를 통해 행복과 불행을 제자리에 배분함이 곧 정의의 실현이다. 율법의 여신 네메시스. 추다르크가 윤석열 검찰의 네메시스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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