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망의 리버풀 vs 맨유 경기 당일. 리버풀 도시 전체에서 비장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리버풀 vs 맨유 전은 한-일 전과 맞먹을 정도. 양측은 서로를 적대시하며 무조건 이겨야 하기 때문에 경기 시간(16시)이 가까워질수록 열기는 더욱 고조되어만 갔다.
나 또한 고조되는 열기에 취해, 결전을 앞두고 무기를 사듯 머플러를 새로이 장만한 후 꿈의 구장 안필드(Anfield)로 향했다. 경기 전 구름 인파 속에서 맥주와 피쉬 앤 칩스도 먹고, 분위기를 즐기면서 입장을 준비했다. 그리고 형들이 들어간 모습을 먼저 보고 난 뒤, 나 또한 별문제 없을 거라 믿으며 입장을 시도했는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슬픈 예감은 끝내 틀리지 않았다.
원래 일이 꼬이려면 작은 일에서부터 틀어지기 마련이라고 웃기게도 기존에 말썽이었던 걱정했던 문제는 해결되었는데, 전혀 예기치 못했던 문제로 인해 입장이 불가해졌다. 입장할 때 빨간불이 떴을 땐 처음으로 빨간색이 싫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정말 한국에서부터 기대했던 경기를 코앞에서 놓치고 못 들어갔을 때의 비참한 심정이란... 속에서 무언가가 쿵 내려앉는 느낌과 함께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든 해결해서 경기장에 들어가기 위해 백방 노력했지만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좌초지종 : 리버풀 경기를 보려면 멤버쉽 카드가 있어야 하는데, 나는 멤버쉽이 없었기에 아는 형의 멤버쉽 빌려서 경기 티켓을 확보했다. 그런데, 형의 멤버쉽 카드가 새로운 멤버쉽 카드였으면 찍으면 바로 들어가는 것인데, 예상치 못한 부분이 옛날 멤버쉽 카드여서 바로 입장이 안 되고 매표소에 가서 본인 인증을 해야 했다. 그래서 매표소에 가서 시도해보았는데, 다른 사람이란 게 판명이 나서 끝내 입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너무나 허망했다. 경기장 바로 밖에서 장내 아나운서가 말하는 선수 소개 소리와 관중의 함성을 뒤로 한 채 경기를 보기 위해 펍으로 걸어가야만 하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근처 펍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근처 펍에 들어가 TV로 축구를 보는데 정말 비통한 심정이었다. 오죽하면 그렇게 좋아하는 리버풀이 전반전에 골을 넣었음에도, 펍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좋아서 날뛰는 와중에도 기쁜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경기는 경기 막판 리버풀 살라의 쐐기 골과 함께 리버풀의 2:0 완승으로 끝이 났다. 나 또한 서서히 기분이 풀리면서 쐐기 골이 터졌을 땐 나름 기쁘기도 했지만 기쁨도 잠시, 경기가 끝나고 안필드에서 리버풀 시내로 돌아가는 길. 끝내 경기장에서 경기를 보지 못하고, 골이 들어간 순간의 현장 분위기를 몸소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에 상당히 낙담하게 되었다. 애써 덤덤해지려고 했지만 우울한 기분을 지우기 힘들었다. 내 인생 최악의 날이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불과 이틀 만에 가장 행복했던 날과 내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최악의 날을 모두 겪고야 말았다. 어제는 참 행복했는데 불과 하루 사이에 180도 변해서 내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최악의 날을 겪게 될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앞으로의 여정이 많이 남았기에 언제까지 우울한 상태로 있을 수 없었다. 지나간 일은 빨리 잊고 새로운 내일을 준비해야 했기에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 우울했던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다음 날(1월 20일). 오늘은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는 날. 어제 경기를 보지 못한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는 차원에서 리버풀 기념품을 몇 개 더 사는 것으로 리버풀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런던 행 메가버스를 타러 갔다.
원래 오늘의 계획은 예약해놓은 메가버스를 타고 10시20분에 리버풀을 출발, 17시20분에 런던에 도착한 후 런던 숙소에 짐을 맡기고 19시에 런던 야경 투어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버스가 20분 이상 늦게 올 때부터 느낌이 쌔 하더니, 갑자기 차가 막히기 시작했다. 문제는 일정상 오늘 무조건 투어를 해야 하는데, 예상치 못한 교통체증 때문에 런던 도착 시간이 계속해서 늦어졌다. 결국 7시가 훨씬 넘어서 도착한 런던. 버스 안에서 계속 맘 졸이다 도착하자마자 배낭에 캐리어 끌고 헐레벌떡 지하철 타고 달려가 투어에 합류했다.
다행히 한국인 20여 명이 함께 하는 야경 투어였기에 뒤늦게 합류했어도 같이 설명 듣고 사진 찍으면서 나름 런던에서의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야경 투어의 마지막 코스 타워브리지 앞에서의 스냅샷 촬영을 찍다가 또 한 번의 시련을 겪고 만다. 스냅샷 사진 촬영을 위해 한쪽 구석에 캐리어와 백팩을 올려놓고 스냅샷 사진을 찍고 돌아온 불과 3분 사이에 나의 평창 백팩은 사라진 것이었다. 한국인 20명이 곁에 있었기에 안일하게 지켜줄 거라 믿었는데 아무도 가방의 행방을 몰랐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캐리어까지 문제가 생기면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왈칵 쏟아졌다. 투어가 끝나고 찾지 못할 가방을 찾기 위해 타워브리지 근처를 정처 없이 떠돌다 소득 없이 말썽 캐리어를 끌고 숙소에 돌아갔는데, 어제오늘 이틀 연속으로 찾아온 시련과 고난으로 나의 멘탈은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그래도 가방 속에 있던 많은 물품을 잃어버렸지만 돈 여권 등 핵심적인 물품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주변의 도움 덕분에 간신히 멘탈을 다잡을 수 있었는데, 이를 통해 인생은 내 맘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이 글을 쓰기 위해 내 인생 가장 힘들었던 이틀의 쓰라린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심란해진다. 특히 경기를 못 봤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나를 슬프게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아쉬움이 더욱 커지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끝내 이 모든 걸 극복하고 이겨내야 하기에 이 당시,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희망을 주는 노래로 이번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인문학당 달리 청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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