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아픈 기억은 훌훌 털어버리고 새롭게 시작된 런던에서의 여정.
만약 예전의 내가 이러한 일(청년 김도훈의 '나를 찾는 유럽 순례' - (3) 너무나 허망한 추억)을 겪었다면 모든 의욕을 잃고 우울함에 빠져 남은 여행도 잘 못즐겼을 거 같은데, 지난 몇년 동안 나도 모르게 사이에 회복탄력성이 커진 것일까? 자고 일어난 기분이 생각보다 너무 괜찮아서 스스로 놀랐다. 물론 생각할수록 백팩과 함께 떠나간 수호랑 인형, 리버풀 비니, 머플러, 어머니가 아끼시던 버버리 목도리, 충전기, 셀카봉 등이 아쉽긴 했지만, 핵심 3요소인 돈·폰·여권은 무사히 잘 간직하고 있었기에 멘탈을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보냈던 지난 몇년의 시간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음에 나름의 뿌듯함을 느끼며 오늘의 일정을 준비해나갔다.
오늘(1월 21일)의 첫 번째 오전 일정은 바로 런던을 대표하는 무료 전망대 스카이가든에서 런던 뷰를 마음껏 바라보는 것이었다. 사전에 예약했던 시간 오전 10시에 맞춰 런던의 명물 빨간 2층 버스를 타고 도착한 스카이가든 전망대는 2017년 1월 3일 방문한 이후 3년 만에 다시 찾은 장소였다. 오늘 안개가 많이 끼어 조금 아쉽긴 했지만, 런던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보면서 지난 과거의 아쉬움을 씻어버리고 힐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처음엔 단지 전망대에서 런던을 내려다보며 여유로운 마음을 얻고자 했는데, 새롭게 사진을 찍고 돌아다니다 문득 3년 전 처음 스카이가든을 왔을 때 나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바로 3년 전 스카이가든에서 찍었던 사진을 찾아 방금 찍은 사진과 비교해보았다. 그동안 런던도 새로운 건물이 많이 생겨났고, 나 자신도 표정은 물론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가 그동안 상당히 좋아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과거와 현재의 만남을 통해 3년의 세월 동안 런던도 계속 발전했고, 나 또한 많이 성장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뜻깊은 시간이었다.
여러모로 의미가 컸던 스카이가든에서 오전 내내 여유를 마음껏 즐기고 나와 리버풀에서 런던까지 이어진 소중한 인연 대규 형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코벤트가든으로 갔다. 오늘의 점심은 런던 맛집 플랫 아이언 스테이크였다. 플랫 아이언이 소호를 비롯하여 여러 군데 있었지만, 특별히 코벤트가든 점을 간 까닭은 코벤트가든 점은 식후 아이스크림을 공짜로 제공해준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스테이크는 물론, 젤라또처럼 쫀득한 데다 초코 가루를 찍어서 준 아이스크림까지 상당히 만족스러운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이후 피카딜리 서커스 거리와 런던 시내를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면서 여유로운 오후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나는 저녁 7시 태양의 서커스 LUZIA 공연을 보러 로열 알버트 홀(Royal Albert Hall)로 향했다.
런던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소이자 미국 얼라이브 매거진이 열거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콘서트홀 중 하나인 로열 알버트 홀. 내가 로열 알버트 홀을 처음 알게 된 연유는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기 시작하면서였다. 클래식을 즐겨 듣다 보니 매년 7월~9월 로열 알버트 홀에서 열리는 BBC Proms 클래식 공연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언젠가 꼭 한 번 클래식을 들으러 와보고 싶은 장소가 되었다. 다만 아쉽게도 내가 가는 시기엔 클래식 공연이 없었기에 예매한 서커스 공연. 비록 클래식 공연은 아니었지만, 평소 유튜브를 통해서만 접하던 장소를 처음으로 방문하는 것이었기에, 상당히 설레는 마음을 안고 로열 알버트 홀로 갔다.
도착한 로열 알버트 홀은 1871년에 개관한 유서 깊은 장소라 그런지 위엄과 전통이 느껴졌다. 한국의 공연장은 그냥 신축, 새 건물 같은 느낌뿐인데 여기는 전통과 기술의 조화, 웅장하면서도 은은하게 전해지는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좋았다. 여유롭게 맥주를 한 잔 마시면서 차분히 기다리다 관람한 태양의 서커스 LUZIA. 공중그네, 공중 줄타기, 사커 댄스 등 매우 다양한 퍼포먼스를 볼 수 있었던 서커스였다. 생각보다 조금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근래에 가장 박수를 많이 친 날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새로운 경험을 시도하고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참으로 좋았던 시간이었다. 다음엔 BBC PROMS 클래식 공연을 보러 꼭 다시 오겠다는 생각과 함께 기쁘게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숙소에서 자기 전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았다. 지난 며칠 시련이 있었지만, 끝내 시련을 이겨내고 새롭게 즐거운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보낸 나의 모습이 문득 운명 교향곡의 4악장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용히 이어폰 끼고 들어본 운명 교향곡을 들어보았는데, 지금 나의 상황과 맞물려 엄청난 감동이 몰려왔다. 돌이켜보면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기 시작하면서 클래식 음악 덕분에 정서적 안정과 정신적 성숙을 이룰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 듣고 있는 베토벤 운명 교향곡처럼 앞으로 어떠한 시련과 고난이 나를 찾아와도 끝내 다 이겨내고 극복하리라는 희열과 함께 오늘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비긴 어게인!
다시 웃으며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서 감사한 1월 21일 런던에서의 하루였다.
<인문학당 달리 청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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