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김도훈의 '나를 찾는 산티아고 순례' (44) 순례길에서 맞이한 첫눈
산티아고 순례길 27일 차((2020. 03. 02)
라 라구나(La Laguna) - 트리아카스텔라(Triacastela) 25km 구간
김도훈
승인
2021.10.17 23:43 | 최종 수정 2021.10.18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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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푹 잘 자고 일어난 3월의 두 번째 아침이 밝아왔다. 그런데 이게 웬걸. 창밖을 바라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라니! 부산사람으로서 눈을 볼 기회가 흔치 않기에 갑자기 설레기 시작했다. 가장 최근에 눈을 본 적이 언제였더라? 군대 시절이던 2016년 겨울에 본 게 마지막이었는데 대략 4년 만에 맞는 눈이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올해의 첫눈을 순례길에서 맞다니. 기분이 최고조에 도달하여 너무 설레 지금껏 걸었던 까미노 중에서 가장 신나게 출발한 하루였다.
주변 어디를 바라봐도 눈으로 뒤덮인 풍경 속에서 세상 가장 해맑은 표정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는데 모처럼 눈 속에서 놀다 보니 엔돌핀이 과다 분비된 탓일까? 눈 오는 날 백구 마냥 하염없이 눈 속을 이리 뛰어다니고 저리 뛰어다니는 필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왜 눈만 내리면 백구들이 동네를 방방 뛰어다니는지를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는데 거기다 눈 오는 날 눈사람이 빠질 수 없지. 맨손으로 눈사람 만든다고 손이 새빨개지고 얼어 고생하기도 했지만, 눈사람과 함께 즐거운 추억을 쌓기도 했다. 들뜬 기분과 감정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았기에 초반 오버페이스를 하기도 했지만, 눈 속에 파묻혀 모처럼 동심으로 돌아간 듯한 너무나 좋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한바탕 놀며 걷다 잠시 바에 들러 커피 한 잔의 여유 함께 언 몸을 녹이기도 했는데, 달라진 표지석의 모양을 통해 어느덧 산티아고가 있는 순례길 마지막 지역 갈리시아 지방에 본격 진입했단 사실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오전 잔잔했던 눈 내림과 달리 특히 1280m 고도를 나타내는 표지판을 지나는 전후로 갑자기 강한 바람과 함께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바람이 상당히 매서웠다. 더군다나 어떤 곳은 무릎까지 꺼질 정도로 눈도 많이 쌓여있기도 하여 눈보라를 뚫고 나아가는 여정이 마치 생존을 위한 투쟁, 흡사 에베레스트 증정하는 것처럼 매우 험난했다.
매서운 바람에 본의 아니게 눈싸다구, 얼굴이 따가울 정도로 눈으로 뺨을 맞기도 하여 임시방편으로 지난번 5유로에 산 선글라스를 꺼내서 착용하기도 했는데 싼 게 비지떡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한쪽 안경알이 막 빠져 결국 궁예 마냥 한 쪽만 가리고 걸어가는 소동을 겪기도 하면서 몇 시간 동안 눈보라를 뚫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온몸이 시릴 정도로 눈과 추위와 고생하기도 했지만, 신기하게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이 모든 순간이 힘들다기보단 그냥 다 좋고 즐거웠다. 언제 또 이렇게 눈을 맞으며 순례길을 걸어보겠나? 는 생각과 함께 행복회로가 계속 돌아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을 만끽하며 뚜벅뚜벅 즐겁게 걸을 수 있었다.
악천후와 각종 눈보라를 뚫고 고도 1300m -> 650m로 내려오니 신기하게 내려오니 눈은 그치고 약간의 햇빛과 함께 기온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오늘의 목적지 트리아카스텔라(Triacastela) 앞두곤 갑자기 비가 내려 비를 맞으며 하루 여정을 마무리하였는데, 오늘은 눈, 비, 바람, 해를 다 겪으며 걸을 수 있었던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또한 오늘은 순례길 여정 중 가장 많은 사진과 영상을 찍고 남긴 하루기도 했다. 눈 오고 바람이 부는 상황임에도 불구 눈 속에서 행복해하는 필자의 모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데 언제 또 이런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을까?
화룡점정으로 알베르게 도착 후 따뜻한 물로 샤워해서 피로를 사르르 녹일 수 있었기에 순례길에서 제일 행복했던 순간,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례길 하루를 뽑으라고 한다면 아마 오늘을 뽑을 것 같다. <글, 사진 = 김도훈 기자>
<인문학당 달리 청년연구원, 본지 편집부위원장 eoeksgksep1@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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