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김도훈의 '나를 찾는 산티아고 순례' (40) 순례길 첫 홀로서기
산티아고 순례길 23일 차(2020. 2. 27)
아스트로가(Astorga) - 라바날 델 카미노(Rabanal del camino) 대략 20km 구간
김도훈
승인
2021.09.23 13:45 | 최종 수정 2021.09.24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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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월이 27일이라니. 처음엔 그렇게 잘 안 가던 순례길에서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참 빨리 흘러가는 것 같다. 이제 300km도 깨졌기에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얼마 안 남은 여정을 소중히 생각하며 걸어가야겠다! 는 새로운 마음가짐과 함께 출발한 오늘의 여정은 라바날 델 카미노(Rabanal del camino)까지 20km 구간이다. 원래는 27km 구간인 폰세바돈(Foncebadon)이었다가 즉흥적으로 변경되었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 계속~
세상 여유롭게 준비를 마치고 알베르게를 빠져나와 늘 그렇듯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중국 우한에서 발발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가면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다. 특히 대구 신천지 등 코로나 여파를 전해 들으며 한국의 코로나 상황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약간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다만 다행히 아직 스페인과 산티아고 순례길은 코로나 청정 지역으로 정말 맘 편하게 걸어가는 중이기에 코로나가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데 아무쪼록 큰일 없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빠르게 잡히고 잘 해결되면 좋겠다.
한국과 달리 완전 평화로운 순례길에서 지난 며칠 동안 계속 강연을 들으며 걸었다면 오늘은 강사에 대해 생각하며 걸은 하루였다. 본인 스스로 드러내는 걸 좋아하는 필자가 이런저런 강연을 막 듣는 이유도 결국은 필자의 이야기나 주제를 말하고 싶기 때문인데 필자가 몇 안 되지만 자신 있어 하는 분야는 바로 발표이다. 대학 시절부터 발표하는 것에 큰 부담이 없었을뿐더러 발표하는 것을 즐겼다. 발표할 내용을 구상하고 머릿속으로 정리해서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은 자신 있었고, 그때그때 너무 딱딱하지 않게 상황에 따라 애드리브도 치면서 내가 준비한 발표를 물 흐르듯이 재미있게 잘해나갔기에 스스로 발표를 잘한다는 믿음과 자부심이 있었다.
다만 강사가 되려면 사람들 앞에서 멋있게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나만의 콘텐츠나 주제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사람들 앞에서 말할 필자만의 특별한 이야깃거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나만의 고유한 콘텐츠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막막하였기에 강사 또한 단지 막연한 꿈, 막연한 생각에 그치고 말았는데, 지금 걷고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하나의 소중한 필자만의 고유한 콘텐츠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아직 순례길을 다 걷진 않았지만 이후 만약 산티아고 순례길 경험과 체험을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 나는 물론 산티아고 순례길을 필자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걷지만, 그 속에서 느끼는 것은 각각 다 다르기에 순례길에서 필자만이 느끼고 체험한 고유한 것들, 나만의 고유한 경험을 어떻게 구성하고 만들어나갈지에 대해 생각하면서 걷기 시작했다. 혹시 모를 기회를 상상하며 준비와 구상을 열심히 하며 걸었던 오전 시간이었다.
그러다 오후엔 삼총사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는데, 문을 연 바가 안 보이지 않았다. 이젠 길가에 눕는 게 이젠 아무렇지도 않기에 길에서 그냥 퍼질러 앉아 같이 빵과 치즈 등 음식을 나눠 먹는 아름다운 추억도 쌓기도 하면서 남은 길을 걷고 걸어 원래 오늘의 목적지 폰세바돈(Foncebadon)에 가기 전 마지막 마을인 라바날 델 카미노(Rabanal del camino)에 도착했다.
삼총사는 오늘 이 마을에서 쉰다고 하던데 지금부터는 경사진 길을 올라가야 하기에 휴식도 취하고 뒤에서 걸어오는 형, 누나도 기다릴 겸 잠시 이들의 알베르게에 들렸다. 그런데 아니 이게 웬걸? 라면을 파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끓인 라면을!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순례길을 걸으러 왔으면 한국어로 된 메뉴판도 있었는데, 라면의 유혹을 참을 수 없었기에 바로 라면을 주문하였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라면은 남이 끓여주는 라면이라고 스페인 이모님이 끓여주는 라면도 상당히 맛있었다.
그렇게 라면을 먹고 다시 출발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삼총사가 오늘 여기서 같이 놀자는 러브콜을 보내왔다. 삼총사가 확실히 필자를 좋아해 줘서 다행인데 그때부터 갑자기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그냥 남느냐 가느냐 가볍게 정하면 되는데 한국인 없이 홀로 남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생기면서 고민이 많이 되었다. 그렇지만 장고 끝에 남기로 결정, 처음으로 형, 누나와 떨어져 순례길 첫 홀로서기를 한 하루이다. 홀로 남아 삼총사와 같이 맥주 마시고 카드 게임을 하고 놀았는데, 첫날부터 어떻게 하는지 도통 모르고 하다가 드디어 러시아 카드 게임(durak)을 이해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또 흥이 많으신 주인 할머니께서 춤과 함께 와인도 공짜로 막 주시고 하여 예상 외로 너무나 즐겁게 먹고 마시며 즐긴 하루였다. Life is beautiful!
처음 한 홀로서기도 걱정과 달리 나쁘지 않았는데 무엇보다 이를 통해 순례길에서 필자의 성향이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예전엔 지금보다 더한 열정맨으로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무조건 뭐든 많이 해야만 직성에 풀리고 만족하였는데 이제는 적당히 쉴 땐 쉬고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게 좋다는 생각이 많이 들 정도로 성향이 변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약간 변하더라도 원래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갈 확률이 상당히 높다. 그렇지만 사람은 변한다고 믿는다. 마치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키듯이.
<인문학당 달리 청년연구원 / 본지 편집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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