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김도훈의 '나를 찾는 산티아고 순례' - (36) 걷는 것보다 배고픈 게 더 힘들어!

산티아고 순례길 18일 차(2020. 2. 22)
모라티노스(Moratinos) - 엘 부르고 라네로(El burgo ranero) 27km 구간

김도훈 승인 2021.08.30 18:46 | 최종 수정 2021.09.02 10:00 의견 0
동이 트는 모라티노스(Moratinos) 아침 풍경과 어제 별을 본 장소

무수한 별이 쏟아지던 하늘과 달리 땅의 터는 안 좋은지 이상한 꿈을 꾸었던 지난 밤이었다. 지인들과 야구를 했는데 필자가 정당한 플레이를 했음에도 불구 여기에 대해 시비를 걸어와 말싸움 끝에 절교를 한 요상한 꿈이었다. 철현이 행님도 이상한 꿈을 꾸셨다던데 왠지 모를 꺼림칙함에 찜찜하기도 했지만 꿈보다 해몽을 믿으며 산뜻하게 시작한 오늘의 여정은 엘 부르고 라네로(El burgo ranero)까지 약 27km 구간이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연 빠에야(프라이팬에 고기, 해산물, 채소를 넣고 볶은 후 물을 부어 끓이다가 쌀을 넣어 익힌 스페인의 전통 쌀요리) 집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 한다는 지난 교훈을 새까맣게 잊고 또다시 조금 더 가면 다음 식당이 나오겠지 라는 안일한 판단을 하고 말았다. 그 결과 요즘은 배 꺼지는 것도 한순간인데, 10시가 넘어가도록 새롭게 문을 연 식당을 찾지 못해 추가 연료(음식)가 들어오지 않아 상당히 힘들게 걸었던 오전 순례길이었다.

유일한 식량 젤리로 버티고 버티다 간신히 도착한 사아군(Sahagún)에서 영업 중인 바를 발견, 커피와 빵, 스파게티를 먹으며 연료를 충전하였는데 배가 든든해지니 이번엔 악몽의 여파(?)인지  피곤이 몰려왔다. 만사가 귀찮고 피로하다 보니 이후 잠깐 들른 마트(Dia)에서 빵을 봐도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따라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치약과 물만 사고 나왔는데 이로 인해 개인적으로 상당히 위험했던 하루였다. 다만 이땐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사아군(Sahagún) 지역의 순례길 풍광.

지금은 배도 든든하겠다, 다 같이 브람스 1번 교향곡을 들으면서 갔는데 형, 누나들이 잠깐 듣는 게 아닌 45분 정도 되는 곡을 끝까지 듣고 소감도 이야기 나누며 걸어 가줘서 고마웠다. 필자가 일일 클래식 전도사가 된 듯한 느낌에 남모를 뿌듯함도 느낄 수 있었는데 부디 이 좋은 클래식 음악을 필자뿐만이 아닌 더욱 많은 사람들이 듣고 즐기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소망을 한 번 담아본다.

음악과 함께 걷다가 잠시 혼자서 걸어가는 시간을 가졌는데 며칠 전 끝내 못 찾은 스틱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여러 인간관계의 복합적인 감정에서 마음을 비우고 싶었던 탓일까? 갑자기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이 생각났다.

순례길에서 발견한 귀여운 문구

알 수 없는 알고리즘 마냥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의해 법륜스님 영상을 찾아 거기서 마음을 달래는 법, 집착과 내려놓는 법을 들으며 걸어가게 되었는데 ‘원래 이기적인 게 인간이다’ “감정은 막 이랬다저랬다 수시로 왔다 갔다 하는 게 당연한 건데 내 감정은 이래야 해! 라고 생각하니까 괴로운 거라고, 다만 내 마음이 어떻게 팔딱 뛰는지를 지켜보라”는 내용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영상을 들으며, 법륜스님과 함께 두 시간을 걸었는데 지금 필자의 상황과 맞물려 많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모든 고통은 내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구나! 순례길을 걸으며 계속해서 욕심을 비워내는 연습도 계속해서 해나가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덧 20km를 돌파했다.

오늘의 목적지 엘 부르고 라네로(El burgo ranero) 해질녘 

이제 마지막 7km만 남겨둔 막바지 시점에 도달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연료가 떨어져 배가 고파오기 시작한 것이다. 더군다나 아까 마트에서 빵을 비롯한 먹을 것을 안 샀기 때문에 먹을 게 하나도 없는 절체절명의 대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아까 왜 먹을 걸 안 샀을까? 후회와 신경도 예민해지면서 걷는 게 처음으로 짜증이 나기도 한 순간이기도 했는데 굶주린 배를 안고 걸어가는 게 마치 고난의 행군을 하는 것처럼 상당히 힘들었다. 남은 7km가 70km처럼 느껴지면서 고통스러웠는데, 다행히 앞서 걸어가던 동연행님에게 빵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막의 오아시스를 발견한 마냥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걸어가 빵을 먹음으로써 대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불 멍과 함께 생각을 비우는 시간

간신히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바로 오늘내일 먹을 식품을 가득 사고 푸짐한 저녁을 먹음으로써 행복한 포만감에 젖어 들 수 있었다. 포만감과 함께 자기 전 멍하니 불 멍을 때리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하였는데, 필자를 차에 비유하자면 고급 스포츠카라고 할 수 있다. 고급 스포츠카 마냥 누구보다 빠르게 걸어갈 수 있지만, 연료를 많이 공급받아야 하는, 연비가 안 좋은, 배기량이 큰 고급 스포츠카이기 때문이다. 이제 필자는 순례길에서 걷는 것보다 배고픈 게 더 힘들다.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