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김도훈의 '나를 찾는 산티아고 순례' - (27) '스마트폰 없이도 살 수 있겠다'
산티아고 순례길 9일 차(2020. 2. 13)
김도훈
승인
2021.07.19 15:10 | 최종 수정 2021.07.21 22:54
의견
0
스페인에서 일주일 넘게 걷고 생활하다 보니 여유도 생겼다. 아침을 챙겨 먹고 자기 전 일기를 쓰는 등의 여러 가지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중에서 필자가 가장 뿌듯하게 느낀 변화 한가지는 바로 스마트폰 사용 시간이 현저히 줄어든 것이다. 스마트폰을 보는 대신 주변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감상한다던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이러한 변화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오늘날 우리는 지하철을 비롯한 어디를 가도 각자 스마트폰 화면을 열심히 바라보고 있는 모습, 심지어 대화를 나누면서도 시선은 스마트폰에 가 있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스마트폰 없이 산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현대인에게 있어 스마트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수품이 되었는데 이는 필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국에서 알고리즘이 이끄는 것에 의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무의미하게 낭비하였던가? 그런데 순례길에서는 걸으면서 음악을 듣거나, 전화할 때, 잠깐 사진 찍고 할 때 외엔 딱히 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마을에 도착해서도 순례자들이랑 같이 먹고 마시고 노느라 아니면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어도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었기에 이 작은 화면을 보는 시간이 확 줄어들었는데, 오늘도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걸었던 하루였다.
오늘은 로그로뇨(Logroño) - 나헤라(Nájera) 구간으로 어제보다 조금 더 먼 30km를 걸어가야 하는데 숙소를 오자마자 외국인 삼총사를 만날 수 있었다. 지난 이틀간 만나지 못해서 더욱 반가웠는데 이들은 아침임에도 불구 웃는 인상에 활기가 넘쳤다. 덕분에 필자 또한 밝고 즐거운 기운을 받으며 아침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 초반 넓은 호수 길을 다 같이 걸어가면서 문득 서양 삼총사들이 순례길에 온 이유가 궁금해졌다.
우선 한국인들, 필자는 1화에서도 말했듯이 자아를 찾고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서, 슬기 누님은 다니던 직장을 퇴사하고 순례길을 걸으러 왔다. 그리고 철현행님은 미국 마이애미에서 셰프 일을 끝내고 머리를 비우기 위해, 동연행님은 친구와 함께 걸으러 왔는데 과연 서양인들은 어떨까?
우선 슬로베니아에서 온 David와 따로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David는 자동차 관련 가게에서 일하다가 그만둔 다음 프로그래밍을 배우러 독일 베를린으로 넘어가기 전 순례길을 걸으러 왔다고 했다. 자동차와 프로그래밍은 크게 연관 없어 보였지만 본인이 하고 싶은 걸 도전하는 이 친구가 정말 멋있게 느껴졌다. 독일에서 온 Kevin 또한, 삶의 다음 단계로 나가기 전 순례길을 왔는데 필자와 비슷한 또래였던 이들과 대화를 통해 느낀 점은 불안한 시기를 지나가는 20대의 고민은 세계 공통이라는 점이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비슷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기에 묘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는데 다만 서양인들은 한국인들과 달리 나이가 늦고 어쩌고 이런 나이에 따른 조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 모습이 부러웠는데 갑자기 David가 필자에게 무엇을 진정으로 하고 싶은지 물어봐 주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했지만, 그간 모호하게 가지고 있던 생각을 정리하여 청중들 앞에서 말을 하는 사람, 강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대 위에 서서 말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기 때문인데 지금은 확신할 수는 없지만, 한국에 돌아가면 작게나마 이와 관련된 걸 하지 않을까?
다만 문제는 한 시간 이상을 영어로 이야기 나누다 보니 소재도 떨어지고 뇌에 과부하가 걸려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귀소본능이 발동하여 바로 형님들에게로 돌아가 한국말을 하면서 편하게 걸으며 무사히 나헤라에 도착하였는데 마을 입구에 중국 음식점이 있었기에 바로 중국 음식으로 허기를 채웠다. 그 후 마트에 가서 한 시간을 구경하며 논 다음 숙소로 가서 푹 쉬다 자기 전 마지막으로 정명훈이 지휘하는 브람스 교향곡 1번 들으며 홀로 마을을 산책하는 시간을 가졌다.
오리온자리를 비롯한 많은 별자리를 바라보며 걸어 다니는데 문득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참 행복한 순간이었는데 새로운 환경에서 같이 걷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즐겁게 걸었던 하루이자 순례길에서 또 하나의 행복한 추억을 쌓을 수 있었던 하루가 저물어갔다.
우리는 스마트폰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는 없겠지만 스마트폰 없어도 잘 지내는 법, 즐겁게 살아가는 방법을 순례길에서 확실히 배우게 된 것 같다.
<인문학당 달리 청년연구원>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