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김도훈의 '나를 찾는 산티아고 순례' - (23) 용서와 극복의 시간

산티아고 순례길 5일 차(2020. 02. 09.)

김도훈 승인 2021.06.29 11:12 | 최종 수정 2021.06.30 19:17 의견 0
오늘의 여정을 알려주는 이정표

순례길의 피로가 갈수록 좀 누적된 탓일까? 오늘 아침은 확실히 피곤하였는데, 아마 어제 늦게까지 술을 마신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습관처럼 어김없이 일어나 준비하고 출발한 오늘의 여정은 팜플로나(Pamplona)에서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까지 약 23km 구간이자 산티아고 순례길의 유명한 명소인 '용서의 언덕'을 걷는 날이다.

사실 지난 이틀 동안 필자가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던 걱정은 첫날부터 지금까지 같이 걸었던 두 사람(슬기누님, 정연)은 필자의 목표(순례길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서 완주해나가는 것)와 달리 다 팜플로나에서 버스를 타고 일부 구간을 넘어갈 예정(소위 JUMP라 한다)이었기 때문에 혼자 남아 걷게 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밝아온 홀로서기 아침, 예정대로 정연이는 버스를 타고 넘어갔는데 슬기누님이 생각을 바꿔 용서의 언덕을 가보고 싶다고 하였다. 다행히 잠시 미뤄진 홀로서기에 감사하며 누님과 같이 걸어갈 수 있었는데 아직까진 같이 갈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필자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누님과 해가 뜨기 전 빠르게 팜플로나 대도시를 빠져나와 지루하고 힘든 아스팔트 길을 벗어나 산길(흙길)로 진입하여, 한 시간가량 걷다 보니 용서의 언덕이 보이기 시작했다. 용서의 언덕 유래를 살펴보면, 한 순례자가 용서의 언덕을 오르고 있었는데 악마가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 빵과 물을 주겠다.”고 유혹을 해왔다고 한다. 첫 번째 유혹엔 넘어가지 않았지만 힘들었는지 두 번째 유혹에 끝내 넘어가게 된 순례자. 언덕에 올라온 후 본인의 실수를 깨닫고 울면서 참회의 기도를 드리자 하느님께서 순례자를 용서해주셨다고 하여 용서의 언덕이라고 한다.

용서의 언덕을 오르는 필자

또한 자갈길로 된 가파른 산길을 걸으면서 자신의 아픔과 미움, 분노를 내려놓으라는 의미로 용서의 언덕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데, 8km 정도 계속 걸어가야 하는 오르막길이라 하여 각오를 단단히 하고 올라갔다. 그런데 되게 힘들 줄 알았던 예상과 달리 생각보다 별로 힘들지는 않았는데, 날씨도 한 몫 했다. 분명 땡볕에 걸었으면 힘들었을 텐데 이날은 안개가 너무 많이 끼어 그런지 올라가는 중간 잠깐 쉬었을 뿐인데 온몸에 감도는 한기란. 날이 추웠던 덕에 순탄하게 용서의 언덕을 올라가면서 용서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필자가 용서를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인지? 애매한 상황에서 일단 누구를 용서할지 생각하면서 걸었는데, 순례길 5일을 걸으며 이미 많은 것을 비우고 내려놓은 덕에 그간 가지고 있던 미운 감정도 다 씻겨 나간 모양이다. 딱히 용서할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필자가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 용서받아야 할 일들이 생각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도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특히 어머니한테 용서를 빌고 싶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지금부터라도 못난 아들이 안 되기 위해 한국에 돌아가면 더욱 열심히 효도 해야지! 다짐과 함께 어머니께 경건한 마음으로 용서를 구하고 그 외에도 필자의 잘못들과 그간 저지른 실수 등을 반성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는데, 여기서 더 중요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안개 낀 용서의 언덕. [사진 = 김도훈]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분들 중에서 필자와 알고 지내던 도중 혹여나 필자에게 화가 났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셨다면 용서해주세요들... ㅠ 이 글을 빌려 여러분들에게도 조심스레 용서를 빌어봅니다. 한국 돌아가면 다시 웃으면서 만나요!

용서를 다 빌고 나자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자 뒤이어 번뜩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문장 하나.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명문장이 떠오르면서 용서와 함께 나 자신을 극복해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 이 용서의 언덕을 오르고 순례길을 걷는 것 또한 나 자신을 극복하는 과정이기에 나 자신을 극복한다는 생각으로 올라갔다. 그리하여 좋은 아우라를 풍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 사람이 가진 기운이나 풍기는 아우라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진짜 순례길을 걸으면서 여유와 함께 긍정적인 사고를 많이 하려고 하다 보니 알게 모르게 서서히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기에 순례길 완주할 때까지 이 기세와 기운을 계속해서 이어 나갈 예정이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가던 도중 힘이 되는 문구 발견

용서와 극복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용서의 언덕 조형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원래는 주변 풍경과 경치가 다 보인다고 하던데, 안개가 너무 많이 껴 있어 정말 주변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약간 아쉬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나름의 운치와 함께 짧은 휴식을 즐긴 후 내려가는데 용서의 언덕은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길이 자갈밭이라 더 험난하고 힘들었다. 상당히 조심조심 내려가는 와중에 무릎과 다리에 약간의 반응이 오는 위기도 있었지만, 내려가는 길목에 쓰여진 한글 응원을 보면서 힘을 내어 무사히 내려왔다.

이후 어제 친해진 철현 동연행님과 함께 4명이 마트에서 장을 보고 와 저녁 요리를 해서 먹었는데, 든든히 밥을 먹고 나자 급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쓰러져 푹 쉬고 일어나니 시간은 어느덧 밤 10시를 가리켰는데 하나둘 자러 가고 홀로 남은 시간, 조용히 하루 일기를 쓰고 숙소에서 발견한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홀로 식탁에 앉아 일기를 쓰고 책 읽는 모습에 스스로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이 글을 읽은 독자분들도 이 기회에 용서와 극복의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인문학당 달리 청년연구원>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