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김도훈의 '나를 찾는 산티아고 순례' - (22) 흘러가는 생각들

김도훈 승인 2021.06.25 16:39 | 최종 수정 2021.06.25 17:03 의견 0
22-1) 순례길 걷기 전 아침 안개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필자.
순례길 걷기 전 아침 안개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필자

순례길 4일 차 아침(2020. 02. 08)이 밝아왔다.

푹 잘 잔 덕에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일어나 숙소에서 제공해준 빵과 잼, 커피로 아침을 먹었는데 평소라면 배고파도 잘 먹지 않았을 차갑고 딱딱한 빵이 의외로 상당히 맛있었다. 잼, 버터를 잔뜩 넣은 빵을 한 입 베어 물고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기분이란. 평소 거의 아침을 먹지 않으며 늘 아침밥보단 아침잠을 선택하는 필자지만 오늘만큼은 빵과 커피로 아침을 든든히 먹고 출발하기 위해 빠져나온 숙소.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길래, 멍하니 안개를 바라보았는데 불현듯 유럽 여행과 순례길을 오고 나서부터 스스로 부지런해지는 것 같아서 상당히 뿌듯했다. 부디 한국에 돌아가서도 쉽사리 게을러지지 않기를! 소망과 함께 걷기 시작한 오늘의 일정은 수비리에서 팜플로나까지 대략 21km 구간이다.

팜플로나는 순례길 걷다가 처음으로 만나는 대도시이자 한국 식품을 구할 수 있는 중국인 마켓이 있었기에 라면을 먹을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걸어갔는데, 라면과 함께 또 하나의 기쁜 소식은 바로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전날까지만 해도 몸이 힘들고 배낭 때문에 어깨도 아팠기에 그냥 땅을 쳐다보면서 걷느라 주변 풍경을 즐길 여유, 틈이 없었는데 걸은 지 4일 만에 배낭이 적응된 느낌이랄까? 배낭이 한 몸처럼 편해지기 시작하면서 걸으며 주변의 풍경 또한 눈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빼곡한 빌딩 숲을 벗어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바라보니 근심·걱정이 자연적으로 치유되었는데, 또 거기다 정연이가 사진도 잘 찍어줘 좋은 기록 또한 많이 남길 수 있었다. 결국 ‘남는 건 사진뿐’ 아니겠는가?

다만 오늘은 아쉽게도 가도 가도 카페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냥 목 좋은 길거리에 앉아 쉬는데 “힘들 땐 땅이 이부자리요 하늘이 나의 이불이니라.” 버팀목인 동료와 함께 길거리에 누워 정말 자연과 하나 되는 순간을 만끽하였다. 자연과 하나 되는 순례길. 그래서 너무 깔끔한 사람은 순례길을 걷기가 힘들지만 필자는 카멜레온과 같은 사람이기에 자연과 일심동체 되어 몸을 충전할 수 있었다. 다만 카페를 못 간 후유증 때문인지 산길을 벗어나 팜플로나 도시 근처 아스팔트 길을 걷기 시작하자 급 피로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거기다 전부터 날씨도 흐려지고 비도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여 마지막 5km 거리를 걸어가는 게 너무나 힘들었는데, 정신력을 발동하여 13시40분. 간신히 팜플로나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하필 토요일이라 그런지 밥을 먹으러 간 식당에 사람도 엄청 많고 음식 대기 시간도 매우 길어 피로가 더욱 몰려오기도 하였지만 끝내 기력을 보충하고 팜플로나 도시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자연과 혼연일체되는 순례길
순례길과 배낭이 적응되어 상당히 신난 필자

넓은 도시를 돌아다니며 현금 인출과 한국 라면도 산 다음 숙소로 돌아와 이제 보다폰 유심칩을 새롭게 바꿔 끼우는 작업을 하였는데 설명서가 하라는 대로 했음에도 불구 제대로 개통이 안 되는 문제가 발생하고야 말았다. 원인을 알 수 없기에 더욱 난감한 상황. 해외에서 데이터가 안 터지면 답이 없기에 불안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안절부절 상태로 유심을 샀던 말톡 회사에 연락하는 등 30분 붙으려 맨 끝에 간신히 해결되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는데, 불안과 혼돈의 유심칩 소동을 겪는 와중에 얻은 한가지 소득.

필자는 무엇보다도 지금 당장 마음의 안정을 원한다는 것. 돈을 좀 더 쓰더라도 불안 걱정 없이 지금 당장 마음 편하기를 제일 바란다는 필자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문제가 해결되기 전 스스로 불안이 너무 극대화되는 점 인지할 수 있었기에 이러한 부분을 진정시켜 나가며 여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 순례길을 통해 불안·걱정을 여유로 채우고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담대함과 걸어가며 계속해서 성장해 나가야겠다는 생각 또한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루나 카페(IRUNA CAFE)에서 볼 수 있는 헤밍웨이 동상

스스로 성향도 다시금 파악하고 유심도 다행히 잘 해결되었기에,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즐겨 갔다던 이루나 카페(CAFE IRUNA)에도 방문하여 핫초코에 츄러스를 먹고 오기도 하였는데 알고 보니 헤밍웨이가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를 집필한 곳이 바로 여기 팜플로나라고 한다. 헤밍웨이가 사랑한 도시 팜플로나에 왔으니 다음에 시간 나면 꼭 헤밍웨이 책도 한 번 읽어 봐야겠다!

순례길에서 만난 한국인들과 즐긴 한국 요리

마지막으로 오늘 숙소엔 한국인들도 참 많았다. 필자, 정연, 슬기누님에 이어 첫날부터 같이 걷긴 했지만 친해질 기회가 없었던 철현·동연행님, 그리고 바욘 길을 혼자 걷고 온 유화까지. 급 한국인 모임이 결성되어 삼겹살에 아까 샀던 라면에 밥을 요리 한 다음 다 같이 나눠 먹었는데, 멀리 스페인에서 다양한 한국인을 만나 한국말을 하며 함께 먹은 한국 음식은 정말 무슨 말이 필요하리. 너무나 편안하고 안락한 팜플로나에서의 한국인의 밤이 저녁 만찬과 이야기꽃으로 무르익어 갔다. 다만 오늘 새롭게 친해진 사람이 있으면 내일이면 떠나는 사람도 있는 순례길. 내일은 과연 어떤 일이 펼쳐질까?

<인문학당 달리 청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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