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4일. 다사다난했던 지난 20일간의 유럽 여행이 끝나고 어느덧 파리에서의 마지막 하루가 밝아왔다. 벌써 마지막이라니.. 이제야 순례길이 진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는데, 오늘 밤이 되면 진짜 심야버스를 타고 파리를 떠나 산티아고 순례길 출발지인 생장으로 향한다.
다행히 지난 며칠 동안 파리 5형제를 만나고 문화 탐방을 하는 와중에도 파리에 온 가장 큰 이유이자 목적이었던 산티아고 순례길 준비는 차질없이 잘해나가고 있었는데 우선 사전에 데카트론에서 봐놨던 장비들(배낭, 침낭, 우비, 스틱, 등등)은 무사히 가지고 와 한국에서 챙겨 온 옷, 각종 약품, 각종 준비물과 함께 차곡차곡 배낭 싸는 법을 완료하였다. 그 외에도 틈틈이 순례길 정보를 계속해서 확인하면서 준비해나가고 있었는데, 어젯밤 운 좋게도 숙소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막 걷고 오신 분들을 만나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혼자 유튜브 영상과 거울을 보면서 배낭 메는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모습을 보시더니 바로 알아차리시고는 배낭 메는 방법부터 여러 가지 순례길 정보들, 생생한 꿀팁을 많이 알려주셔서 살아있는 귀한 정보도 많이 얻음으로써 최종적인 준비를 마무리할 수 있었는데, 다만 런던에서부터 계속 말썽이던 캐리어가 문제였다. 원래라면 캐리어를 순례길 출발지에서 목적지인 산티아고로 택배 붙이면 되는데, 이미 망가진 캐리어였기에 계속 가져가기보단 그냥 오늘 짐을 한국으로 보내기로 결정!
따라서 오늘의 계획은 먼저 한국으로 택배를 보낸 다음 오르세 미술관을 갔다가, 몽파르나스 타워에서 마지막으로 시간 보낸 후 심야버스 타고 넘어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필자가 간과했던 사실 하나. 아무 생각 없이 11시쯤 숙소를 나와 우체국으로 가던 도중 알게 되어 갑자기 시간이 매우 붕 뜨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우체국 근처에서 어찌어찌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택배를 한국에 붙이고 나니 시간은 어느덧 3시. 시간이 애매해져 끝내 오르세 미술관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아 조금만 더 빨리 움직일걸! 후회가 많이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꿩 대신 닭이라고 차선으로 에펠탑 근처 파리 시립 현대 미술관으로 향했다. 짐을 보내 한결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둘러본 파리 시립 현대 미술관. 백남준 선생님의 작품도 전시되어있고 여러 좋은 작품들이 많았는데 작품 감상과 함께 창 너머로 바로 에펠탑을 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이를 통해 오르세를 못 간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며 혼자만의 시간을 마음껏 보낼 수 있었는데, 예술과 힐링으로 파리에서 마지막 오후 시간을 보낸 다음 성빈이가 주고 간 또 하나의 선물. 몽파르나스 타워 전망대로 향했다.
몽파르나스 타워 전망대에서 해질녘부터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기까지 몇 시간 동안 멍하니 바라본 파리 시내. 혼자서 에펠탑을 비롯한 파리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다 보니 그간의 여정과 마주한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시원섭섭한 감정이 교차하기도 하고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문득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이번 파리 여행은 타이밍이 참 좋았다. 홀로 조용히 순례길 준비만 할 생각으로 클래식 공연 하나 예약 외에는 아무런 계획 없이 왔던 이번 파리. 없었던 계획만큼이나 기대도 거의 안 하고 있었는데, 타이밍이 좋았기 때문에 파리 민박에서 파리 5형제를 만날 수 있었고 화이트 에펠도 보고 심야버스를 타보는 것은 물론 박물관&미술관 무료입장도 할 수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타이밍이 잘 맞은 덕분에 가장 알차면서도 즐거운, 좋은 추억을 많이 쌓은 지난 며칠을 되돌아보며 뭐든지 타이밍이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을까? 혹자는 운명도 거스르는 게 타이밍이라고도 하던데 좋은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선 난 무엇을 해야 할까? 문제는 그 타이밍을 맞추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마치 주식처럼. 일과 사랑 명예 무엇이든 좋은 타이밍을 맞출 수만 있었다면 필자의 인생은 지금과 얼마나 많이 달라졌겠는가? 타이밍을 맞춘다는 것은 인간이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진인사대천명’이라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할 일을 열심히 해놓고 결정적일 때 하늘이 좋은 타이밍을 내려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무력한 결론이기도 하지만 부디 좋은 타이밍을 만날 수 있기를, 좋은 타이밍이 나에게 찾아와주길! 타이밍이 어긋나는 비극, 슬픔을 덜 겪게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몽파르나스 전망대에서 파리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내려와 이제 진짜 심야버스를 타러 가는 길. 야간이라 혼자 가는 길이 괜스레 더욱 무섭기도 했지만, 스틱의 힘을 빌려 버스 정거장에 도착하였는데 출발 예정 시간이 지났음에도 버스가 오질 않았다. 불안과 함께 유럽은 정시 개념이 없다는 사실을 마지막까지 확인할 수 있었는데, 정신을 잘 차린 끝에 무사히 떠날 수 있었던 파리. MERCI PARIS. 심지어 그리운 파리 지하철 냄새도 안녕.
불편한 버스에서 잠을 청하며 무려 11시간 30분을 타고 간 끝에 프랑스 남서쪽 지역의 바욘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바욘에서 마지막으로 기차 타고 조금 더 들어간 끝에 마침내 도착한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 출발지인 St Jean Pied Port(생장 피에드 포트). 이제 도시 여행은 끝나고 진짜 순례가 시작된다. 여행 끝 고행 시작! 약간 두렵기도 하지만 아직은 정말 설렌다. 앞으로 순례길에선 어떤 일들이 어떻게 펼쳐지게 될까?
<인문학당 달리 청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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