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평소보다 여유로운 시간 오전 7시30분에 기상하여 딸기잼을 바른 식빵과 또띠아로 아침을 먹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눈뜨자마자 아침을 먹는 자신의 모습에서 여러모로 군대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필자가 군대 전역한 이후 아침을 먹은 게 정말 손에 꼽을 정도인데 아침 식욕이 살아난 것은 물론 이렇게 잘 먹게 되다니. 물론 아침을 먹지 않으면 걸을 수 없는 생존형 식사이긴 하지만 순례길 생활이 군대 생활과 유사하다는 느낌과 함께 시작된 오늘의 여정은 에스테라(Estella) → 로스 아르코스(Los arcos) 약 21.5km 구간이다.
또한 오늘은 슬기누님이 버스를 타고 넘어가기에 필자 혼자 걸어가는 날이기도 하다. 슬기누님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홀로 본격적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순례길의 새로운 낙이 되어버린 통화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속도 좀 시원해지고 마음이 편해지면서 혼자서 순례길을 걸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통화가 끝나갈 무렵 순례길의 또 하나의 유명 명소이자 흔히 와인을 무료로 맘껏 먹을 수 있는 장소로 알려진 보데가스 이라체의 와인의 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보데가스 이라체의 와인의 샘은 순례자들의 위해 옆 와인 양조장에서 공짜로 vino(와인)와 Agua(물) 지원해주는 곳이다. 달달한 와인을 좋아하는 필자의 입맛에 그렇게 맛있는 와인은 아니었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와인과 물을 마시며 갈증 해소와 더불어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었는데, 거기다 철현, 동연행님과 삼총사들과도 다시 조우할 수 있었던 것은 덤. 같이 웃고 마시며 즐거운 휴식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와인의 샘 옆에 적혀있는 글귀 하나가 필자의 눈에 들어왔다. 뜻을 찾아보니 “순례자여, 이 위대한 와인 한 잔이 부디 그대들이 산티아고까지 무사히 갈 수 있는 힘과 활력, 행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와인과 멋진 문구 덕에 다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는데 오늘은 순례길에서 처음 보는 사람도 몇몇 보였다.
앞에 홀로 걸어가시는 처음 보는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은 알 수 없는 용기가 생겨 다가가 대화를 나눠보니 이탈리아에서 오셨고 이탈리아에서 출발하여 두 달 동안 계속 걷는 중이라고 하셨다. 그 외에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상당히 대단하고 멋진 할아버지셨다. 또한 영어가 서툴러도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하려는 필자의 모습에서 좋은 징조라는 생각과 함께 뿌듯함을 적립할 수 있었는데, 멋진 할아버지와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홀로 쉬던 도중 뒤따라오던 철현, 동연행님이 보여 남은 길은 형들과 같이 걸어갔다.
사실 철현, 동연행님은 첫날부터 얼굴을 본 사이긴 했지만, 두 분이 너무 끈끈하게 붙어 다녀 딱히 친해질 틈도 없었고 친구 사이에 무턱 끼는 것에 대한 부담 때문에 처음엔 어색하진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는데 예상외로 편하게 맞아주시고 군대 이야기를 비롯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방 어색함을 풀고 친해질 수 있었다. 생각보다 형들과 잘 맞아서 앞으로 행님들과 같이 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겹경사로 오늘은 날씨 운도 상당히 좋았다. 사전 정보엔 그늘이 없는 구간이라 태양 아래 수분 섭취를 충분히 해야 한다던데 흐린 날씨 덕에 덜 힘들게 선선함을 만끽하면서 형들과 평탄하지만 재미는 없었던 길을 꾸역꾸역 걸어 마침내 오늘의 목적지 로스 아르코스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반전이 일어났다. 첫 번째 반전은 오늘 버스를 타고 넘어가기로 한 슬기누님이 버스를 안 타시고 걸어서 로스 아르코스까지 온 것이다. 예상치 못한 반전에 완전히 놀라게 되었는데 새롭게 형성된 완전체 4명이 같이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돌아와 저녁을 먹었다. 고기에 참치마요, 치킨너겟, 피자와 샐러드 등 엄청난 고칼로리에 푸짐한 저녁 만찬을 먹으면서 이러다 살 빠지긴커녕 오히려 살이 찌는 건 아닌지 처음으로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순례길에서는 먹을 것을 사고, 식사 준비하고 먹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다만 오늘의 숙소 알베르게 위생 상태가 12유로 치곤 상당히 심각했다. 로스 아르코스에 문을 연 다른 알베르게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하루를 묵어야 하는데 한 두 달은 안 빤 듯한 침구류가 너무나 충격적인 최악의 알베르게였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싹 튼 웃음이랄까? 두 번째 반전으로 충격적인 위생 상태의 숙소가 예상외로 너무 많은 웃음을 선사해주었다. 극악이었던 숙소의 열악한 환경이 웃음 포인트가 되었는데 더러운 이불을 철현행님이 손가락으로 들어 올리는 것도 웃기고 동연 행님도 말을 되게 재미있게 하여 지난 파리 시절, 파리 5형제와 지내면서 웃었던 이후로 정말 많이 웃을 수 있었던 하루였다.
뭐든지 열악한 환경에서 고생을 해봐야 오래도록 기억에 남고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던데 사실이었다. 아까 걸었던 평탄한 길이나 그냥 무난히 지냈던 알베르게는 시간이 지나면 잘 기억도 안 날 것 같은 데 비해 최악의 알베르게인 줄 알았지만, 오히려 순례길 중에서 제일 많이 웃을 수 있었던 최고의 반전 도시 로스 아르코스였다. 당시에는 스트레스도 받고 힘들기도 했지만, 평생 가지고 갈 아름다운 추억이 된 것 같다. 로스 아르코스. 아마 한국 돌아가서도 쉽게 잊을 수 없는 지명이지 않을까?
<인문학당 달리 청년연구원>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