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길을 나선다는 건 매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지난 유럽 여행을 끝내고 또다시 새로운 길 앞에 서 있는 필자.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 새로운 모험을 앞두고 설레면서도 두려운 감정이 공존하는 생장에서의 첫날(2020.2.5)이 시작되었다.
사실 순례길을 오기 전 필자가 가장 불안했던 부분은 걷는 날 한국인이 한 명도 없으면 어떡하나 하는 점이었다. 스스로 크나큰 용기를 냈기 때문에 이렇게 산티아고 순례길을 올 수 있었지만, 막상 완전히 새롭고 낯선 곳을 혼자 헤쳐나가려 하니 걱정이 많이 되기도 했다.
홀로 순례길을 끝까지 버틸 수 있을까? (물론 막상 혼자 남으면 혼자서 잘 헤쳐나가겠지만) 여러모로 약간 자신 없기도 했는데 다행히 생장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한국인을 만날 수 있었다. 주인공은 슬기누님. 새로운 길을 갈 때면 알게 모르게 생기는 긴장 속에서 통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같은 한국인이라는 동질감이 크나큰 심적 안정과 큰 위안을 주었는데 덕분에 한결 편하게 갈 수 있었던 생장.
그리고 생장 역에서 또 한 명의 순례자, 대만에서 온 우첸옌도 만나 영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같이 걷는 동지라고 할까 묘한 동질감이 느껴져 순례길에선 누구든 쉽게 친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급속도로 친해진 누님, 우첸옌과 같이 늦은 점심을 먹고 순례자 여권(크리덴시알)을 발급 받으러 간 생장 순례자 사무소.
우리를 맞이해 준 매우 인상 좋으신 할아버지, 할머니께 크리덴시알(Credencial)[순례자 여권으로 까미노를 걷는 순례자에겐 반드시 필요한 서류, 크레덴시알이 있어야만 전용 숙소인 알베르게(Albergue)에서 묵을 수 있고, 각 구간 별로 받을 수 있는 스탬프를 통해서 자신이 까미노를 걸었다는 증거를 남길 수 있다.]을 발급을 받고 기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데, 상당히 친절하게 설명해주셔서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순간이었다.
크레덴시알 발급과 함께 순례자 등록을 마치고 다음으로 조개 껍데기를 고를 시간. 산티아고 순례길의 조개껍데기는 가리비이다. 그런데 다른 표식도 많을 텐데 왜 하필 가리비 껍데기일까? 여기엔 2가지 설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말을 탄 기사가 바다에 빠졌다가 야고보(예수의 3대 제자 중 한 명이자, 예수의 제자 중 가장 처음으로 순교한 제자)의 도움으로 살 수 있었는데 물에서 떠오른 기사를 보니 가리비 조개껍데기가 감싸고 있었다는 설, 또 하나는 순교한 야고보의 시신을 배에 태워 바다로 보냈더니 흘러 흘러 스페인 이베리아 해안에 닿았고 가리비 조개껍데기들이 시신을 보호하고 있었다는 설이 그것이다.
이처럼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필자의 행운의 부적이 될 가리비를 매우 신중하게 고르는데 이제 진짜 순례자가 되었다는 긴장과 설렘의 공존. 크레덴시알을 발급받고 조개를 골랐던 이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이후 생장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55번 알베르게(순례자들이 이용하는 숙박업소)에 자리를 배정받고 남은 시간 생장 마을을 한 번 돌아다니다 슬기누님, 우첸옌과 간단히 저녁을 먹고 야경을 보러 갔는데 마을이 작아서 그런지 어둑해지자 하늘에 별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별자리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었는데, 별자리를 아는 우첸옌 덕분에 오리온자리, 카시오페아자리, 북극성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고 비록 사진에는 담을 수 없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담을 수 있었는데 최근에 멍하니 하늘의 별을 바라본 적이 언제였던가? 군대에 있을 때 이후 정말 오랜만에 별을 바라보는 여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돌아온 숙소에서 그냥 홀로 일기를 쓰면서 하루를 조용히 정리하고자 하였는데, 옆에서 술 마시며 카드 게임을 하던 외국인 친구들이 갑자기 나를 부르더니 같이 놀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당황하기도 했지만 합류하여 어떻게 하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카드 게임을 함께 하며 순례길 걷기 전날 밤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말을 잘 알아듣진 못했어도 함께 어울렸다는 큰 의미가 있었던 시간을 마무리하고 내일을 위해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이제 진짜 내일이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산티아고 순례길.
제주 올레길의 모델이 되기도 한 산티아고 순례길은 예루살렘, 로마와 함께 유럽의 3대 성지 순례지인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교회에 이르는 길로, 1189년 교황 알렉산더 3세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성지로 선포하면서,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죄를 없애준다는 칙령을 발표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걷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예수의 제자인 산티아고(성 야고보)가 걸은 길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는데,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되자 유럽과 전 세계로부터의 성지순례가 더욱 활발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필자가 내일부터 걸어가게 될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 길은 프랑스 남쪽 끝에 위치한 생장에서 시작하여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산티아고로 향하는 800km의 길이다.
800km를 걷는 동안 어떠한 일들이 펼쳐질까? 어떠한 만남과 추억, 변화를 얻게 될지 설렘 반 기대 반! 부디 이번 산티아고 순례길을 통해 심신을 무장하여 더욱 멋진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인문학당 달리 청년연구원>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