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김도훈의 '나를 찾는 산티아고 순례' - (20) 비워야 채울 수 있다

김도훈 승인 2021.06.18 11:55 | 최종 수정 2021.06.25 17:01 의견 0
프랑스 생장을 출발, 본격 순례길을 걷는 필자

2020.02.06. 본격적으로 시작된 순례길 걷기 여정.

약속이나 한 듯이 다들 7시 전후로 일어나 정리 및 걸을 준비를 하는데 전운이 감돈다고 해야 할까? 필자도 그렇고 다들 말은 안 했지만, 아침부터 왠지 모를 비장한 기운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준비를 마친 8시. 하나둘씩 시작의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산티아고 순례길 대망의 첫걸음, 대장정의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오늘은 목적지인 론세스바예스까지 대략 26km를 걷는 일정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처음부터 피레네산맥을 넘어가기 때문에 첫날이 제일 힘들다고 들었는데, 론세스바예스까지 가는 두 가지 루트 : 험준한 산을 오르지만, 경관이 아주 멋지다는 나폴레옹 길과 보다 완만하고 안전한 우회로 발칼로스 길 중에서 발칼로스 길로 향했다. 사실 첫날이라 의욕도 넘치고 해외에 오면 열정맨이 되는 필자. 마음 같아선 무조건 나폴레옹 길을 따라 걷고 싶었는데, 어제 인상 좋으신 노부부께서도 신신당부하셨듯이 동절기인 11월에서 3월까지는 나폴레옹 길을 폐쇄한다고 한다. 따라서 조금 아쉽지만 쌀쌀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걸어간 우회로 발칼로스 길.

차가 지나가는 도로를 많이 걸어야 해서 약간 아쉽기도 했지만, 걷는 건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가던 도중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국경을 넘어가는 지점을 마주하기도 하였는데 근처에 아무런 표식이 없어 그냥 지나칠 뻔하다 간신히 구글맵을 보면서 위치를 파악한 다음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간 걸 스스로 자축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걷게 된 스페인 땅. 뜨거운 정열의 나라에서의 펼쳐질 앞으로의 순례길 여정이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산뜻하게 움직이다 보니 시간은 어느덧 점심시간.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겨울철이라 그런지 문 연 식당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기존에 챙겼던 빵과 스낵으로 간단히 몸을 충전하였는데 어제 만났던 슬기 누님과 이야기 나누면서 걷기도 하고 도중에 러시아에서 온 제인도 만나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계속해서 걸어갔다. 그러다 혼자 따로 걷기도 하였는데, 혼자 걷던 도중 문득 생각. “와 내가 진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네” “순례길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무엇을 얻고 돌아가야 할까?” 순례길을 걸으면서 걷는 의미를 찾아야겠다는, 의미를 얻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칼로스 길을 걷는 필자

하지만 뜬구름을 갑자기 잡을 수 없거니와 한 편으로는 필자도 한국인이어서 그런지 뭐든지 너무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굳이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지 말고 일단은 그저 순례길을 걷는 것에만 오롯이 집중하면서 즐겨보는 게 좋지 않을까? 달리 생각하여 그간 가지고 있던 의미라는 강박에서 벗어나다 보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걷던 도중 본격적으로 피레네산맥과 마주하게 되었다.

가히 죽음의 언덕(?)이라고 할 정도로 길도 가파르고 험난한 구간이었다. 처음엔 멋도 모르고 힘차게 걸어갔는데,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옥의 오르막 산길을 계속 걷다 보니 어느 순간 땅만 바라보고 걷고 있는 필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표지판만 보고 다니니까 방향은 알겠는데, 초행길이다 보니 이게 정확히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가늠이 안 되어 더욱 힘겨웠는데, 놀랍게도 몸이 힘들다 보니 의미를 찾겠다는 거창한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야 말았다. 정말 ‘빨리 숙소에 도착했으면, 힘들다, 살고 싶다’ 등 생존의 욕구만 솟아나는 것만 느낄 뿐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예기치 않게 무념무상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는데, 이 기회에 막 생각하려 하지 말고 한 번 완전히 비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목적지까지 4.8km 남았음을 알려주는 표지판

뭐든 마음을 비우면 비울수록 잘 풀린다는 사실을 필자 또한 5년 전 군대를 지원할 당시 몸소 경험한 적이 있다. 의경이 좋다는 소식에 계속 원하고 지원한 의무경찰 시험에선 연거푸 떨어지고 의무적으로 가는 군대도 내 마음대로 못 가는 현실에 좌절하고 있었는데, 일단 지원만 했을 뿐 경쟁률도 높아 딱히 큰 기대도 안 하고 있던 최전방 수호병에 덜컥 붙은 바람에 운 좋게(?) 빠른 군입대를 할 수 있었는데, 이를 통해 인생사란 무언가를 갈망할수록 집착하면 할수록 더 멀어지고 얻지 못한다는 사실, 비울수록 잘 풀려나간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비우는 것이 제일 어렵다는 점이다. 지금껏 생각, 미련, 집착을 버리지 못해 고생과 함께 얼마나 많은 것들을 날려 보냈던가? 아픈 과거가 떠오르면서 비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울 수 있었는데 감사하게(?) 고된 육체노동을 하다 보니 자연적으로 생각이 잘 비워졌기 때문에 더 많은 걸 채우기 위해 지금은 가능하면 내려놓기로 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처음에 생각을 온전히 비워나가다 보면 언젠가 새로운 것들로 가득 채워지지 않을까?

생장에서 론세스바예스까지 걸어온 거리뷰

또한 힘들 때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또한 느낄 수 있었는데 혼자 앞서 걸어가다 지치고 막막함에 주저앉아 쉬고 있을 때 슬기 누님과 제인, 뒤에서 걸어오는 순례자들을 만날 수 있었기에, 함께 걷는 사람들 덕분에 힘을 얻어 함께 무사히 목적지인 론세스바예스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숙소에 도착한 후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하며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숙소가 하나뿐이라 함께 걸었던 사람들을 그대로 숙소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기에 이런저런 이야기와 함께 다른 순례자들과도 친해질 수 있었는데 이게 순례길이구나! 무사히 걷고 도착했다는 성취감에 마음이 너무 뿌듯했던 하루가 저물어갔다.

<인문학당 달리 청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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