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김도훈의 '나를 찾는 산티아고 순례' - (30) 따뜻하고 치열한 사람
산티아고 순례길 12일 차(2020. 2. 16)
벨로라도(Belorado) - 아헤스(Agés) 약 28km 구간
김도훈
승인
2021.08.01 15:28 | 최종 수정 2021.08.0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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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지켜본 한국인들은 뭐든 빠르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빨리빨리의 민족답게 항상 제일 빨랐다. 기상도 빠르고 걷는 것도 빠르고 그래서 항상 숙소에 먼저 도착하는 사람들 역시도 필자를 포함한 한국인이었는데 순례길에서 10일이 지나면서 뭐든 빨리 빨리해나가는 것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보통 산티아고 순례길은 봄(3~4월)과 가을(9~10월)에 많이 가는데 이때는 워낙 걷는 사람이 많기에, 숙소 잡는 것부터가 전쟁이라고 한다. 늦으면 숙소에 못 들어갈 수도 있기에 항상 빠르게 걷고 움직인다고 들었는데 지금 걷고 있는 2월의 까미노는 걷는 인원이 적어 숙소에 못 들어가는 불상사가 없었다. 빨리 가나 늦게 가나 어차피 거의 다 같은 숙소에서 만나고 유일한 차이는 침대 1층을 차지하느냐 2층을 차지하느냐에 불과했기에 차츰 레이스, 질주 본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처음엔 누구보다 빠르게 출발하고 걸었으나 이제는 서양인들보다 더 여유로운 한국인이 되어 여유로운 아침 시간을 보내고 출발한 오늘의 여정은 벨로라도(Belorado) - 아헤스(Agés) 약 28km 구간이다.
제일 마지막에 출발하였지만 급하게 움직일 이유가 전혀 없기에 한결 여유롭게 걸어가는데 오늘은 오전부터 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어제보다 더한 아니 한국 거제도 바람의 언덕에서 불어오는 바람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역대급으로 강한 바람이었다. 끊임없이 불어오는 강한 바람에 걷는데도 불구 땀이 나기는커녕 오히려 몸에 체온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상당히 추운데다 바람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야 했기에 에너지 소모 역시 상당했다.
여러모로 춥고 지치다 보니 그간 하던 사색은 자연스레 안드로메다로 떠나보내고 사색 대신 요즘 필자가 푹 빠져있는 영상을 찍으며 걸어갔다. 남는 건 사진, 기록뿐이라고 강한 바람을 뚫고 지나가는 필자의 모습과 심경을 영상으로 남기니 상당히 재미있었는데, 강한 바람에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자 경험을 영상으로 남길 수 있었다. 지금 찍은 영상을 훗날 다시 보게 된다면 이 당시 기억과 추억이 떠오르면서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번지지 않을까?
열심히 걸은 자여 쉬어라! 바람을 헤치고 한참을 걸은 끝에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느껴지는 바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들어가 커피와 초콜릿, 그리고 여러 음식을 먹고 마시며 지친 몸과 마음을 충전한 후 다시 걸어가는데 오후엔 모처럼 슬기누님, 철현, 동연행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을 수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슬기누님이 넌지시 필자에게 장점이 많은 사람인 거 같다고 그리고 필자는 따뜻한 사람이란 이야기를 해주었다. 예상치 못한 이 말에 감동을 살짝 쿵 받았는데 따뜻해진 가슴과 함께 예전 기억하나가 떠올랐다.
언젠가 필자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질문을 받았던 적이 있다. 그리고 고심 끝에 했던 대답이 바로 ‘따뜻하고 치열한 사람이 되고 싶다’였는데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때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무의식의 힘이랄까? 아직 치열하진 않지만, 서서히 따뜻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믿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이 많다. 아직 삶의 여유가 많이 없어서일까? 쿨하지 못하고 대가를 바라는 모습이라든가 호불호가 확실한 탓에 늘 따뜻한 사람이라기보단 사람에 따라서, 나의 상황에 따라서 선택적으로 따뜻한 건 아닌지를 이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더욱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다시금 따뜻하고 치열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지만 늘 가슴 한구석엔 따뜻하고 치열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기에 앞으로도 따뜻한 사람, 그리고 인생을 치열하게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 계속해서 나아가야겠다.
오늘의 목적지 아헤스(Agés)에 무사히 도착해서는 늘 하던 대로 씻고 저녁을 먹고 쉬면서 내일 일정을 짰는데, 내일 도착하는 목적지 부르고스(Burgos)는 대도시라 빨래도 하고 편하게 쉴 겸 알베르게 말고 에어비앤비를 예약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알베르게를 벗어날 생각에 신이 났는데 강한 바람과 추위에 고생했던 탓일까? 순례길에서 제일 일찍 잠든 날이었다.
여타 사족으로 필자의 순례길 여정에서 뜻밖의 행운이자 감사한 부분은 바로 동연행님이 순례길 가이드북을 가지고 다니시며 매일 걷는 일정을 봐주시고 항상 동연행님, 슬기누님이 다음 숙소를 미리 찾고 정해준다는 점이다. 덕분에 필자는 일정에 대한 부담 없이 편안하게 걷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었는데 다시금 함께 걷는 형 누나에게 감사한 순간이었다. 앞으로도 남은 일정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인문학당 달리 청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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