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김도훈의 '나를 찾는 산티아고 순례' - (34) 도둑맞은 스틱
산티아고 순례길 16일 차(2020. 2. 16)
프로미스타(Fromista) -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Carion de los Condes) 19.7km
김도훈
승인
2021.08.19 17:37 | 최종 수정 2021.08.23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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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6만 보를 걸은 성취감 덕분일까? 12시부터 7시까지 정말 푹 잘 자고 일어난 16일 차 아침이었다. 상쾌한 기분으로 걸을 준비를 마치고 아침을 먹는데 요즘 들어 많이 걷는 만큼 먹성 또한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 예전엔 아침을 안 먹어도 오전에 딱히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던 필자인데 아침부터 컵라면에 피자 한 판, 거기다 계란 8개를 가볍게 먹고 거기다 더 먹었을 수도 있을 정도로, 말 그대로 위가 위대해진 상태가 되었다. 거기다 어제 문을 연 바를 찾지 못해 배고픔과 싸우며 걸었던 일이 남겨 준 교훈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둬야 한다!’를 실천하고 출발하는 오늘의 여정은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Carion de los Condes)까지 19.7km이다.
어느덧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 길의 절반 정도를 걸어왔다. 조금 있으면 400km대도 깨질 정도로 많이 걸어서 그런지 오늘과 같은 20km 거리는 이제 식은 죽 먹기처럼 느껴지는데, 그간 경험에서 나오는 바이브를 바탕으로 느긋하게 출발하려는 도중 뜻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필자의 스틱이 안 보이는 것이었다. 주인아저씨도 안 보이고 내 스틱은 어디로 사라진 거야? 10분을 둘러봤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누가 스틱을 착각하고 잘못 가져간 거라 믿고 하는 수 없이 남은 스틱을 챙겨 걸어가는데 필자의 것이 아니라 매우 찝찝했다.
그래도 날씨는 어제에 이어 걷기엔 딱 좋은 날씨라 밝은 기분으로 은우를 비롯한 친구들과 통화를 하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평소 한국에선 전화를 잘 안 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순례길을 걸으며 통화하는 시간이 식성만큼이나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났다. 이는 필자의 성향도 한몫했다고 생각하는데 필자는 여러 고민과 각종 스트레스 등을 속에 담아두질 못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화를 속으로 달래면서 조용히 푸는 사람도 있던데 필자는 혼자 속으로 꾹 참고 끙끙 앓다가는 스스로 미쳐버리는 지경에 이르기에 마음속에 있는 걸 밖으로 내뱉으며 풀어야 한다. 다행히 은우, 성욱이처럼 전화로 필자의 주절주절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친구들, 맞장구쳐주고 공감해주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스트레스도 풀고 많이 웃기도 하면서 걸어갈 수 있었는데 이들이 없었다면, 속에 있는 스트레스를 토해내지 못했다면 순례길에서 화병에 걸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다시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러다 필자가 들고 온 스틱의 본래 주인이 차를 타고 나타나셔서 바로 돌려드렸는데, 다리가 불편하신 분이었다. 누가 잘못 가져간 줄 알고 가져왔다고 하니 이해해 주셨지만, 괜스레 죄송한 순간이기도 했다.
이제 남은 길, 늘 들고 다니던 스틱 없이 걸으려니 손이 상당히 허전했는데 도중 만난 Erin, David에게 스틱이 사라졌다고 하니 어디서 구해 온 나무 지팡이를 빌려줬다. 꿩 대신 닭이라고 나뭇가지를 스틱 삼아 걷는데 특유의 밝고 따뜻한 기운을 내뿜는 Erin과 David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다. 거기다 David가 다음 알베르게에 가면 스틱을 찾을 수 있을 거라면서 옆에서 되게 긍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주어 여러모로 감동이었다. 무엇보다 첫날과 비교해서 영어가 상당히 많이 늘었다고 말해줘서 기뻤는데 첫날엔 잘 알아듣지도 못하더니 지금은 많이 알아듣는다고 미국인(Erin)이 직접 이야기해줬다. 더욱 자신감도 생기고 뿌듯했는데 얘들도 필자를 좋게 봐주고 필자도 계속 이들과 확실히 계속 말을 하려고 하다 보니 여전히 답답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훨씬 나아지는 것 같다. 여러모로 퇴행하기보단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아서 뿌듯한 순간이었다.
이윽고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한 후 다 같이 햄버거도 만들어 먹고 쉬면서 오후의 여유를 만끽했다. 그러던 찰나 Erin이 프로미스타(Fromista) 알베르게에 옷을 두고 와 히치하이킹을 하여 다녀오는 소동이 있기도 했는데 우리가 오늘 2~3시간 걸어서 도착한 거리를 차로는 5분 만에 갔다 왔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참 허망하면서도 웃겼는데 차가 아닌 걷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거라 믿으며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필자의 스틱은 끝내 찾지 못하였다. 필자의 스틱이 좋아 보였나? 들고 아예 멀리 달아난 거 같은데 누군진 몰라도 아무쪼록 스틱 잘 쓰길 바랍니다. ㅠ
<인문학당 달리 청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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