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김도훈의 '나를 찾는 산티아고 순례' - (33) 의지의 6만보!

산티아고 순례길 15일 차(2020. 2. 19)
온타나스(Hontanas)-프로미스타(Fromista) 약 34km 여정

김도훈 승인 2021.08.15 14:46 | 최종 수정 2021.08.17 14:24 의견 0
오늘의 목적지 프로미스타(Fromista)에서 순례자들이 다 함께

오늘은 어제 묵었던 온타나스 알베르게 상태도 안 좋고 무려 34km를 걸어야 하는 일정이기에 숙소에서 일찍 출발하였는데 역대급으로 추운 하루였다. 전에는 강한 바람이 많이 불어서 추웠는데 오늘은 출발했을 당시 기온이 영하 4도로 기온이 낮았다. 장갑을 꼈음에도 불구 스틱을 집은 손이 너무 시려올 정도로 몸속으로 들어오는 한기에 오랜만에 군대 야간 근무를 서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는데 출발한 지 두 시간이 지난 9시 무렵에도 추운 기운이 사라지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추위에 곤욕을 치르다 다행히 발견한 바에서 커피와 오믈렛을 먹으며 잠시 몸을 녹였다. 그런데 더 든든하게 많이 먹고 출발했어야 했는데 다음 바에 들려서 먹고 쉬자는 안일한 판단을 하고야 말았다. 예상과 달리 이후 문을 연 바와 슈퍼를 만나지 못해 추위와 배고픔을 안고 걸어가야만 했던 완전한 오판이었다. 따라서 걷는 게 조금 힘들었는데, 그래도 해가 뜨고 날이 따뜻해지면서 서서히 힘을 낼 수 있었다.

해가 뜨기 시작하는 아침 하늘의 모습. 달의 모습도 보인다.

따스한 태양 아래 드넓은 평야를 지나가는데 사방이 탁 트여 있다 보니 마음도 관대해진다고 해야 하나 세상 여유로워지고 평온해졌다. 거기다 앞에 보이는 고지를 넘어가는데 올라가는 건 조금 힘들었지만 다 오르고 나서 내려다본 스페인 평지와 순례길 풍경이 정말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저 멍하니 마음의 응어리, 안 좋은 기운들을 씻어내릴 수 있었는데 왜 스페인 사람들이 한없이 여유로운지를 몸소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여기에 있으면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이후 한층 맑아진 마음으로 한국에 있던 친구 성욱이와 통화를 하며 그동안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에 지금까지 서로의 면면을 다 아는 친구라 전혀 이런 말을 하는 사이가 아닌데 여행 가더니 많이 성숙해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괜스레 당황스러우면서도 뿌듯했는데 그렇다면 순례길 걷기 전인 14일 전과 비교해봤을 때 지금의 필자는 얼마나 많이 달라졌을까?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 순례길 풍광 모습. 고지가 저기 앞에 보인다.

공부와 마찬가지로 순례길을 걷고 있는 궁극적인 이유 또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 생각하는데 다행히 필자 스스로 느끼기에 지난 2주 동안 시나브로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과거 몇 년 전과 비교해봤을 때 엄청난 발전,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을 자부하는데 언젠가 한 번 과거 사진첩을 훑어본 적이 있다. 그때 과거 필자의 사진을 보고 스스로 충격받아 황급히 사진을 삭제했던 기억이 떠오르는데 요즘은 셀카를 찍어도 사진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표정도 한층 밝아지고 여유로워 보이면서 여러모로 많이 괜찮아지는 모습을 느낄 수 있는데 혹시 독자분들도 그렇게 느끼시나요?

누가 뭐라 하든지 간에 나날이 괜찮아지고 있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얻고 이런저런 게임과 이야기를 나누며 남은 길을 걸어 5시40분쯤 오늘의 목적지 프로미스타(Fromista)에 도착했다. 바로 마트에서 장을 본 다음 저녁을 먹고 잠시 쉬었는데 아이폰 건강 앱을 확인해보니 현재까지 5만4000보를 걸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제 대만 우첸옌이 5만9000보를 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갑자기 승부욕이 발동했다. 나는 오늘 6만 보를 채워야겠다! 모처럼 찾아온 이번 기회를 놓치면 후회할 거 같았다. 이때 아니면 언제 6만 보를 걸어보겠나? 높아진 실행력을 발휘하여 바로 숙소 계단을 오르내리고 끝내 숙소 밖으로 나가 숙소 주변을 삼십 분가량 걸으면서 끝내 대망의 6만 보를 채웠다.

 탁 트인 고지 위에서 휴식을 취하는 필자.

한다면 한다! 의지의 한국인이자 한 번 꽂히면 반드시 해야 하는 필자 인생 첫 6만 보를 채우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버섯 핀초와는 때와는 또 다른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는데 벅차면서도 뿌듯함이 몰려왔다. 많이 걸어 몸은 피곤했지만, 황홀했던 기분을 잊을 수 없는데 매우 행복하게 꿈나라로 갈 수 있었던 하루였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순례길에서 얻고 돌아가고 싶은 좋은 기운/아우라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음으로써, 또 오늘 6만 보를 채운 것처럼 작지만 소중한 성취 경험을 통해 서서히 바뀌어나가는 것 같다. 지금껏 뭘 해도 안 되는, 흔히 말하는 암흑기가 있기도 했는데 안 좋은 기운을 하나둘씩 바꿔나가 술술 잘 풀리는 시대가 오기를! 앞으로도 계속 나를 믿고 사랑하며 지금처럼 꾸준하게 나아가보자!

한다면 한다! 필자가 오늘 끝내 걸은 거리 및 걸음

<인문학당 달리 청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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