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686)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3장 누님 또 누님들⑱

이득수 승인 2024.02.18 00:00 의견 0

정색을 하면

“가시나 니는 아침 잘 묵고 나간 자식이 저녁나절에 죽어나자빠지는 꼴을 봤나? 생때같은 자식이 죽어 가슴에 묻어봤나?”

그만 울먹울먹 어깨를 들썩이다 기어이 눈물을 흘리면 아무 말도 못 했다. 그것도 한 번 두 번이지 매 번 쓰는 작전이라 마침내

“또 성식이 들먹이며 울 때 됐다! 울 때 됐다!”

휴게소에 내릴 때마다 덕찬씨가 영순씨에게 속삭이면 영순씨는 그저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13. 누님 또 누님들⑱

“그런데 왜 그 난리를 치르면서 나한테 연락이 없었을까?”

문득 열찬씨가 의아해하는데

“아이구, 이 양반 정신머리 좀 봐라. 그 새 내가 몇 번을 이야기 했는데 또 잊어뿌고...”

영순씨가 혀를 끌끌 차며

“말도 마소. 그 때 성식이 죽었다고 연락 왔을 때 당신은 세일병원서 다리를 자르나 마나 굿이 났을 때 아잉교?”

“아, 맞다. 그렇제.”

비로소 열찬씨가 기억을 되살렸다.

1992년 여름, 마흔두 살의 열찬씨가 돌연한 교통사고로 괴정 동산병원에서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처참한 자신의 몰골을 보며 앞으로 어떻게 헤쳐 나가야 될지 절망과 공포에 나가 있을 때

“열찬아!”

“아이구, 열찬아!”

네 명의 누님이 허겁지겁 달려와

“우짜꼬! 많이 아푸제?”

세 누님이 천장에 달아맨 오른 쪽 다리를 만지며 눈물이 글썽하자 둘째 순찬씨는

“주여!”

금방 울먹이며 긴 기도를 시작했다.

“월깨 니가 고생이 많제?”

이어 큰누님 갑찬씨가 짐 보퉁이에서 무언가 꺼내면서

“아나, 메밀묵이다. 동생 좋아한다고 밤새 끼맀다.”

하자

“나는 모숭기에 바빠서...”

하며 덕찬씨가 송구한 표정으로 봉투하나를 내밀자 순찬씨도 잠깐 기도를 끊고

“내 보따리에 봐라. 딸기하고 찹쌀하고 녹두가 있다. 딸기는 지금 묵하고 같이 동생도 주고 우리도 묵고 간호원이나 옆에 환자들도 주고.”

하는데

“나는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빈손이다. 아이구, 열찬아! 내 동생아!”

하며 금찬씨가 순찬씨보다 더 큰 소리로 울먹거리며 눈물을 훔치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모두들 농사를 지어서 얼굴이 까무잡잡하면서 두리뭉술한 네 자매의 등장에 동산병원 4층 수십 명의 환자와 가족과 문병객과 간호사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는데

“많이 아푸지요? 이 묵이랑 딸기 좀 잡숫고 완쾌하시고 예수도 좀 믿으세요.”

순찬씨를 필두로 네 자매가 묵과 딸기가 담긴 접시를 들고 병실을 돌며 병상마다 음식을 돌리고 간호사실에도 넉넉하게 넣어주었다. 고만고만한 누님이 넷이나 되는 것도 대단하지만 순찬씨가 보는 사람마다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하다가 간혹 성경책이나 찬송가가 보이는 병상에서는

“아이구, 교회에 나가시는가베요. 할렐루야!”

하면서 바로 울먹울먹 기도에 들어갔다. 마침내 서너 시간이 걸린다는 수술을 하기 하루 전

“와요? 당신 겁이 나능교? 세상에 겁나는 것이 없는 독불장군 가열찬이가?”

빙그레 웃는 영순씨에게

“신평 큰누님하고 김해 작은 누님하고 오면 안 되는가? 내일 수술할 때.”

해서 수술 당일 마취직전

“열찬아, 겁내지 마라. 아부지, 엄마 조상님들이 돌볼 끼다.”

갑찬씨가 손을 꼭 잡아주자 순찬씨는 열찬씨의 아픈 다리를 짚고 기도를 시작했다. 수술이 끝나 회복실에서 나올 때

“열찬아!”

네 누님들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초조하게 기다리던 장모 소야댁이 멈칫했다. 항렬로 치면 장모 소야댁이 부모항렬이지만 너무 젊어 부모 맛도 나지 않고 뭔가 기대고 의지할 기분이 아니라 환자인 열찬씨가 장모보다 나이가 서너 살씩 많은 위의 두 누님을 수술 전에 보았으면 했던 것이었다.

이후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기본인 묵과 함께 딸기, 참외, 토마토를 병실에 돌리면서 할렐루야를 외치는 순찬씨를 비롯한 열찬씨의 네 누님은 마침내 지구를 지킨다는 아이들의 만화영화 독수리 5형제에 버금가는 촌할마시 4자매가 되어 온 병원을 휘젓다 못해 아무환자나 손을 잡고 하느님을 믿으라며 긴 기도를 하는 바람에 명물 4자매로 불리다가 묵접시 4자매, 공포의 4자매로 불리기도 했다. 올 때마다 묵을 해오는 첫 째, 과일을 가져오는 둘째에 비해 음식솜씨에 자신이 없어 경제권을 쥔 고린자비 남편 고차대씨에게 사정사정해서 돈을 조금 얻어와 영순씨에게 조금씩 찔러주는 덕찬씨와 달리 셋째 금찬씨는 늘 빈손이었고 입장이 묘할 때면

“할렐루야!”

순찬씨의 기도를 따라하며 울먹거렸다. 하루는 문병이 끝난 네 자매가

“우짜면 저거 집안의 가장이자 우리 형제들의 기둥인 우리 열찬이를 살릴꼬?”

순찬씨의 제의로 네 자매가 머리를 짜내는데

“내사 묵 말고는 뭐 하는 줄 아는 기 있나? 자연산 미꾸라지로 추어탕을 끼리오든지.”

갑찬씨의 말에

“나는 지 철 과일하고 또 뭐 생각해 논 기 있다.”

순찬씨도 의기양양한데

“나는 솜씨가 없어서 돈이나 쪼깨씩 낼 게.”

덕찬씨에 이어

“나는 뭐로 하면 좋을꼬?”

코너에 몰린 금찬씨가 머뭇거리는데

“박 서방네 니는 개소주를 해라. 촌에 돌아댕기는 노란 약개를 구해서 그 너른 집에서 푹 고면 되지.”

순찬씨의 배분에

“알았심더.”

하고도 금찬씨의 얼굴이 어둡자

“형님, 돈은 걱정하지 마소. 내가 개 값은 드릴게요.”

하자 비로소 금찬씨의 얼굴이 펴졌다. 단 한 번도 넉넉하거나 편안하게 살아본 적이 없어 남에게 무언가를 준다는 일에 익숙하지 못 하기보다는 아예 발상이 안 된다는 것을 이미 꿰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이후 갑찬씨는 묵 외에도

“남자들한테는 들깨가 제일이라 카더라.”

하며 들깨를 꿀에 재어오기도 하고

“빨간 해삼에 배를 재어 묵으면 좋다더라.”

이것저것 챙겨와 먹이는 데 평소 먹성이 좋은 열찬씨도

“누님, 이거는 도저히 안 넘어가네. 당최 목이 막혀서.”

입속에서 뱅뱅 돌며 도무지 안 넘어가는 꿀에 잰 들깨 때문에 콜록거렸다. 하루는 순찬씨가

“야야, 아무소리 하지 말고 이거 한잔 마시거라!”

됫병짜리 소주병에 가득 든 노란 액체를 유리컵에 가득히 따라 건네는데 비위가 좋은 열찬씨도 도무지 감당 못 할 역겨운 냄새에

“누님, 이기 뭥교?”

“몸에 좋은 기다. 일단 묵기나 해라.”

순찬씨가 품에서 박하사탕 한 봉지를 꺼내 한 알 먹이고 억지로 입을 벌리며 잔을 들이밀어

“아이구, 냄새야!”

오만상을 찌푸리며 잔을 내려놓자

“우리 신랑이지만 비위하나는 최고다.”

영순씨가 코를 싸매면서도 웃었다.

“그럼. 뼈를 다치거나 이열(瘀血)든 데는 똥물이상이 없지.”

안 그래도 의심이 가득한 열찬씨에게 바로 방금 먹은 그 역겨운 약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었다.

“말도 마라. 오래 된 변소 밑바닥에서 똥물을 구하는 기 얼마나 힘드는지. 너거 자영이 자주 삐꿈을 타서 그렇지 처남들 한테 잔정은 또 얼마나 있는지. 옛날에 일찬이 살린다고 한밤중에 각골화장장에 가서...”

하는데

“새야, 그 이바구는 하지 마소. 골치 아프다.”

막내 순찬씨가 가로막자

“그래 진영 배 밭에 왜정 때부터 있었다는 근 백년이나 되는 변소, 똥 누다가 아아도 여럿 빠져죽었다는 깊고 큰 돌까리바닥 변소에 너거 형부가 짚을 짤라 모가지를 막은 병을 넣어서 사흘 만에 짚을 타고 깨끗하고 맑은 물만 들어간 것이 이 노랗고 빛깔도 좋은 만병통치약이다.”

의기양양한데

“자, 개소주!”

금찬씨가 먹기 좋게 팩으로 만든 개소주를 한 자루 내려놓아 우선 한 팩을 먹이자

“자, 형님!”

영순씨가 봉투하나를 찔러주었다. 빈손으로 온 덕찬씨가 그날도 영순씨에게 봉투하나를 건네주며

“명촌에 얼매 존노?”

귀에 대고 속삭이자

“8만원.”

“많이도 존네. 개 한 마리 5만원이면 되는데.”

“욕받다 아잉교? 고생했다고 쪼매 더.”

“형제간에 그런 기 어딨노? 욕보는 기사 당연하지.”

“...”

굳이 고생을 해서라기보다도 개소주도 생강 값이니 수공이니 개 값 말고도 가욋돈이 들어갈 것이 빤한데 그냥 개 값만 주어서는 너무나 앙통시러운 그러니까 아깝고 원통한 생각이 들 것이 자명한 금찬씨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이었다.

“참, 형님은 정석이 하고 아부지 산소 간다고 고생했지요?”

“뭐로?”

※ 이 글은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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