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45)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6장 수남댁, 돈을 들고 튀어라(5)

이득수 승인 2024.05.14 16:49 | 최종 수정 2024.05.15 17:37 의견 0

“야. 그 보다 아부지 와 그라는데요? 삼촌들하고 고모가 울고불고 난리아잉교?”

“마, 시끄럽다!”

“...”

“그 기 어데 내 혼자 잘 묵고 잘 살라꼬 그라나? 다 니 잘 되라고 하는 짓이다.”

“...”

“내 인자 집에 갈 끼다. 너거 엄마 보고 저녁 채리놓아라 캐라. 내 배가 고파 죽겠다.”

“...”

그렇게 끝난 부자간의 대화가 이튿날 바로 온 마을에 퍼지고 훗날 두고두고 말이 된 것이었다.

16. 수남댁, 돈을 들고 튀어라(5)

상찬씨가 못내 아쉬워하는 이야기의 주인공 대동댁 장남인 화옥씨는 6.25가 나기 전의 스무 살 무렵에 부모가 시키는 대로 장가를 들어 열찬씨보다도 세 살이나 많은 월자, 한 살이 많은 월숙이 자매를 낳고 6.25중에 의용경찰로 집을 떠나 돌아다니다 돌아와서 진호, 진철이, 진숙이 남매를 줄줄이 낳을 때쯤 의용경찰시절에 안 서울여자를 데리고 들어와 진형이, 월련이를 비롯해 또 줄줄이 아이들을 낳아 두 배에서 낳은 자식이 한 타스가 넘는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인물이 달덩이처럼 훤하던 큰딸 월자는 시집을 가자말자 죽고 작은 딸 월숙이는 어릴 때 죽고 진호, 진철이를 비롯한 열 명의 아이들이 연산동 3공구에 두 집으로 나뉘어 오물오물 모여 살 시절에 동사무소아재로 불리며 같이 지냈던 것이었다.

“야야, 화옥이형님 집에 무슨 일이 있었노?”

상찬씨와 작별하고 길가에 대어둔 차를 빼는 백찬씨에게 묻자

“뭐, 별일은 아입니더. 진호형님이 욕심을 좀 부려서 그렇지.”
“진호형님이라니 화옥이 형님이 우리한테 6촌형님이니 진호는 니 한테 조카아이가?”
“예. 그래도 내 동갑친구 진철이보다 두 살이 많으니 자꾸 형님소리가 나와서 말입니다.”

“그래 뭔 일 있었는데?”

“아이구, 시간이 좀 걸릴 긴데. 일단 형님은 우리 차에 타소. 그라고 너거는 서울형님 차에 타고.”

아이 둘을 내보낸 뒤

“화옥이형님이 늙어서 언양에 도로 내려온 것 알지요?”

“그래 내캉 연산3동에 직원과 통장으로 일할 때는 방도 그 형님 집 옆에 얻고 이웃에 살았다 아이가?”

“그렇다 카대요. 그라다가 양복점은 망하고 진철이엄마 그러니까 형수도 죽고.”

“그렇지. 그 이야긴 들은 것 같다.”

눈앞에 연산3동 1통 3공구의 전경이 훤하게 펼쳐졌다. 초량역화재이재민인 초량동45번지 철거민들이 정책적으로 이주될 당시 6.25때 잠시 의용경찰을 지낸 화옥씨는 양복기술을 배워 옛날 나지막한 산비탈인 3공구의 오솔길의 3거리에 양복점을 열었고 동생 원규씨는 마주보고 세탁소를 열었는데 형수가 중남 들내에 논밭이 많은 부잣집이라 형수명의의 기다란 슬레이트집을 지어 세를 놓았는데 나중 영순씨와 결혼한 열찬씨의 신혼집이 바로 그 기다란 달 셋방의 맨 마지막 칸이었다.

사람의 운명이 아주 작은 인연이나 어쭙잖은 일로 결정되듯이 열찬씨가 처음 부산시공무원으로 입사할 당시 부산에 아무 연고가 없자 그나마 가장 가까운 진외6촌인 두 형이 사는 동래구의 연산3동을 지원했는데 마치 고구마줄기처럼 역시 화옥씨의 사촌동생인 조일댁의 맏딸 복님이누님도 이웃 연산동2공구에서 목수인 허서방과 사이에 오롱조롱 아이들을 매달고 있었고 그 복님이 누님의 동생인 버든마을 최고의 우장바우 정구씨도 한쪽 눈길이 좀 이상한 키가 작은 형수를 얻어 단간 셋방에 아이를 낳고 월부장사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6촌인 열찬씨가 가세하고 그 위에 화옥씨의 작은 댁으로 서울내기 또는 가짜배기로 불리는 진형이엄마가 아이를 넷이나 낳아 무려 여섯 가족이 화옥씨를 중심으로 연산동에 모여산 것이었다. 그 옛날 전라도지리산에서 흘러들어온 키가 팔대장승같은 부처손이란 이름의 처녀와 그 처녀를 찾아 나타난 곰처럼 털이 부슬부슬하던 오라비 곰쇠가 나란히 버든에 자리를 잡은 이후 그 손자손녀만 3,40명이 되었으니 어떻게 보면 전라도지리산 밑의 뜨내기와 언양신불산 밑의 토박이가 만난 동서화합이 성공한 결과인 것 같다고 나중에 나이 든 열찬씨가 픽 웃었다. 그러나 이제 나라경제나 개인의 생활이 보릿고개를 넘어서 제법 틀을 갖추고 있을 때 한 여름 웅덩이의 올챙이처럼 오불오불 모여 사는 이 한 무리의 핏줄들은 아직도 하루하루 먹고살기에도 걱정인 하층민을 벗어나지 못 하고 있었다.

연산3동의 직장과 셋방을 모두 옮기고 차츰 뜸하던 6촌들과의 만남이 열찬씨가 서구청으로 직장을 옮기고는 명절에 진장산소에서 가끔 마주쳐 반갑다고 악수를 하는 정도로 소원해졌다.

그 사이에 열찬씨가 아는 화옥씨의 마지막 소식은 양복점이 시중에 기성복이 나옴으로서 사양길에 접어들자 빚을 조금 내어 스리쿼터라도 불리는 조그만 3발이 트럭을 사서 양복천을 싣고 부산 근방의 기장, 울산, 양산, 밀양, 김해, 창원등지로 돌아다니며 팔았는데 어찌 된 셈인지 양복기지라고 불리는 옷감은 나갈 때마다 줄어드는데 집에 들고 오는 돈이 없어 자꾸만 새 밑천이 들어가고 빚이 느는 것이었다. 화옥씨가 처음 양복기지장사를 시작할 시절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고양이에게 반찬가게를 맡기는 격이라고 했는데 그건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그 위에 특히 여자를 좋아하는 화옥씨가 가는 곳 마다 술집이 있고 여자가 있고 수중에 돈이 있는 판에 장사한 돈이 들어갈 곳은 너무나 빤하다는 것이었다.

옛날 어느 멸치잡이 어장주인이 서울걸음에 나섰다가 마포나루 술집의 논다니에 빠져 멸치잡이 배 두 척이 다 날아가자 ‘아이구, 그놈의 여편네 치마속이 깊기도 하네, 멸치 배 두 척이 다 들어가도 깃발조차 보이지 않네.’ 하고 한탄을 했다는 말처럼 수중에 돈 있고 집에 안 들어가도 되고 사람 실어 나를 자동차까지 있는 판에 이 잘나가는 화옥씨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말린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결국 사업이 망하고 연산동 양복점이 넘어갈 때쯤 화옥씨는 부산살림을 정리하고 버든의 큰 집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해군에 입대했던 장남 진호와 진철이, 진숙이 등은 제각기 짝을 찾아 결혼을 했고 둘째 부인 서울내기와 그 밑에서 난 진형이와 월련이등의 남매들도 각기 제 알아서 시집장가를 가고 사는 모양이었다.

버든마을 웃각단 맨 꼭대기 본가에는 아버지 대동김손이 죽고 목소리가 젤 괄괄하고 불같아 불칼이라는 별명이 붙은 어머니 대동댁이 혼자 살다 다 망하고 돌아온 장남을 두 말 없이 받아들였다. 손이 안으로 굽는 것이 인지상정인데다 당시의 어머니들이 그저 장남이 원질이라며 금 쪽처럼 아끼던 시절이라 성질이 괄괄한 대동댁도 장남에게만은 듣기 싫은 소리 한 마디 하지 않고 눈치를 슬슬 보는 것이었다.

객지에서 다 말아먹고 본가로 돌아오는 것도 멋쩍고 체면이 안서지만 일단 집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자 자동으로 집과 논밭이 자동으로 화옥씨 몫으로 떨어졌다. 신평으로 시집간 딸을 두고라도 화옥씨에게는 언양에 사는 순규씨, 서울에서 달력공장 정판(精版)사를 하는 정규씨와 그를 따라 올라간 말규씨, 부산의 원규씨 네 동생이 있고 그들 모두가 부모재산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 대동댁이 워낙 장남 화옥씨를 싸고돌며 방침을 해서 입도 벙긋 못 했다. 마침 미등기부동산임시조치법이 시행되어 논밭과 집을 모두 화옥씨 명의로 넘긴 후에 어머니 대동댁이 죽고 부인 월자엄마도 잇따라 죽어 여든이 넘은 화옥씨 혼자 집을 지키며 어디서 배워온 봉침(蜂針)이나 놓아주면서 소일했다.

그런데 문제는 장남 진일씨였다. 늙어 몸도 쇠약하고 정신도 흐릿한 아버지 화옥씨를 부추겨 조금씩 땅을 팔아가는 것이었다. 백찬씨의 동갑친구인 진철씨를 비롯한 동생들이 항의해도 끄떡도 않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집터만 남았는데 이번에는 형제들이 나서서 절대로 그렇게 못 한다, 이번이 마지막이니 만큼 아버지가 거처할 집이라도 장만하고 형제들 간에도 얼마간 돈을 나누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건 아버지하고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너거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말로 진일씨는 동생들을 입막음했다. 등기권리자가 죽어 자식들이 상속하는 경우도 아니니 형제들의 도장을 받거나 동의도 받을 필요가 없이 화옥씨의 인감으로 보상금이 나오는 판이라 달리 따질 수도 없었지만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그 떡이라는 말에 이번이 마지막이니 만큼 다문 얼마라도 줄 것으로만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꼬드겨 마을에서 맨 먼저 보상금을 수령한 진일씨는 형제들에게 돈 한 푼은 물론 달다 쓰다 말도 없이 울산으로 돌아가 커다란 2층 건물을 지으며 형제들의 항의에 눈도 끔뻑 안 했다. 그래도 아버지 화옥씨를 모셔간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새 집이 완공되어 입주할 때쯤 화옥씨는 석남사 아래 조그만 셋방으로 옮겨져 혼자 끓여먹고 사는데 80노인의 몰골이 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미 여기저기 잔병이 있고 머리도 맑지 않은 화옥씨가 어쩌면 겨울을 넘기지 못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백찬씨는 동갑친구 진철씨에게서 상찬씨는 앞집의 6촌 형 순규씨로 부터 이야기를 듣고 기가차서 혀를 끌끌 찼지만 당사자의 차남이나 동생인 진철씨, 순규씨도 어쩌지 못 하는 일에 그저 안타까워 할 뿐이었다.

“그래. 그렇구나! 내 옆에서 지켜봐서 알지만 화옥이형님이 살림을 모르고 아이들만 자꾸 낳고 술이나 마시고 살았지만 사람하나는 참 순하고 착했는데 그 장남이 그래 독하고 욕심 많은 사람인 줄은 몰랐구나. 다 자업자득이기는 하지만.”

혀를 끌끌 처던 열찬씨가

“그래도 우리 집은 형수가 진작 다 팔아 조진 덕분에 이 판에 속상할 일은 없겠구나.”

하고 씁쓸하게 웃으니

“형님도 몸 건강히 지내소. 미우나 고우나 영주형수에게 전화나 한 번 해봐야겠네.”

하고 정석이의 차에 탄 아이들을 불렀다.

어느 듯 가을이 지나고 12월이 되자 아파트 건너로 보이는 장산자락의 고지대에 빨간 십자가와 파란 조명이 채송화가 가득한 꽃밭처럼 피어났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와 성당걸음이 잦은 영순씨에게

“당신은 좋겠다. 연말에 심심찮게 오갈 데도 다 있고...”

혼자 거실에서 빈둥거리다 밤 열한시가 넘어 들어오는 아내에게

“이리오소. 늦은 김에 같이 맥주나 한 잔 하면서 한해를 되돌아보세.”

하고 다 늙은 내외가

“새해엔 당신도 복 많이 받고 그렇게 원을 하던 장편소설이나 어서 착수하소.”

“그래요. 내년엔 우리 둘 다 건강합시다.”

“건배!.”

“건배!”

좀 멋쩍기는 하나 아주 진중하게 건배를 하고

“올 한 해 우리는 각자 무얼 하고 지냈을까?”

열찬씨의 말에

“내사 마 당신 하는 대로 따라다닌 그림자지. 뭐 특별히 한 게 있나? 영서가시나 돌보는 것도 인자 역할이 줄어들고 가끔 구서동 밭에도 댕기고. 아, 참 미국여행이 있었구나. 그것 하나는 참 당신에게 고마운 일이지.”

“그래. 그렇게 생각하니 참 다행이군. 나는 그런 것보다도 당신이 열심히 성당에 다니며 생각도 깊어지고 행동도 차분하고 만사 사려가 깊어진 것이 고마워. 성탄절 축하해. 파우스티나!”

“고마워요.”

하던 영순씨가

“당신은 한 해가 좀 어땠나요?”

“뭐 그렇고 그렇지. 당신덕분에 하루하루 밥 안 굶은 삼식이생활에 충실하면서.”

“그 기 아일낀 데? 서구청에 알바해서 돈도 좀 벌고 그 스토리텔링 책도 나오고 또...”

“...”

“진주여잔가 뭔가 하고 나 몰래 전화질한다고 꽁재미를 보고.”

“또 그 이야기?”

“하여간 전화기가 하나 박살났지만 마무리를 잘 해주어서 고마워요.”

“...”

“그라고 무엇보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보람 있게 사는 것 같았어. 남수단의 성자 이태석신부의 추모시를 쓰는 일이 아무나 하는 일이겠어. 그 시를 쓰려고 비디오를 보고 자료를 뒤적거리며 고생을 하다 나중에 완성된 시를 읽을 때는 내 남편이 참 괜찮은 사람이란 생각이 다 들었어.”

“아이구, 오랜만에 마누라한테 칭찬을 다 듣네. 그러고 보니 추모시도 시지만 남구청과 노인복지회간에 강의도 나간 일이 생각나구먼. 당신은 강의수당 몇 푼 받아서 둘이 가르거나 밥을 먹는 정도로 알겠지만 나는 내가 소설가나 문필가가 되거나 국어교사나 교수가 되어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해보려던 오래 된 꿈을 처음으로 실현한 일이었지.”

하는 열찬씨의 뇌리에 남구노인복지회관의 박혜영이란 직원이 <송도 해안볼레길> 스토리텔링집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며 노인복지회관에 나오는 고졸이상의 고학력자를 대상으로 스토리텔링을 가르쳐 남구의 이기대와 오륙도등 해안일대를 스토리텔링하여 책자를 내겠다고 하여 오전 오후 여섯 시간의 강의 및 현장실습을 하고 그걸 안 부산시 노인복지회관에서 연락이 와 또 여섯 시간을 강의한 일이었다. 물론 시간당 8만원씩 꽤 많은 강의료를 받아 영순씨와 가르고 남은 돈으로 슬비네와 언양의 가천린포크로 가서 산지에서 나오는 한우1등육을 실컷 먹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이 하고 싶은 강의, 우리말 국어와 언어풍습, 우리나라의 자연과 정서에 대하여 이야기할 기회를 가진 것이 너무 좋았다. 영순씨가 자러 간 뒤 열찬씨는 컴퓨터를 켜고 보낸 메일함에 수록된 당시의 강의자료를 찾아 새삼스레 읽어보며 깊은 감명에 젖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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